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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9 (14:34:47)

영국 ART ROCK의 역사 제1

 

1966!... ART ROCK의 탄생

410474.jpgART ROCK은 무엇인가? 본지 “ART ROCK"이 출범하면서 늘 들어왔었던 질문이다. 그것을 간략하게 정의 한다면 ” ART ROCK ROCK의 하나의 부류, 장르로써 ROCK에 미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 젊은이들의 음악으로 상징되는 ROCK에 순수예술이 첨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50년대 중반 ROCK & ROLL이 탄생했을 당시 사회는 이러한 음악형태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항적이며, 외설적이라는 이유가 지배적이었지만, 새로운 문화에 대한 사회의 거부적인 반응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해 왔었던 것이다. 그 이후 ROCK & ROLL은 영국에 상륙하면서 ROCK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60년대 초반, R & R이 미국에서는 TWIST SURFIN’ 또는 HOT ROD 그리고 ELECTRIC SOUND로 변형되고 있는 동안, 영국에서는 영국인 기질에 맞는 형태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공로자들은 Beatles, Rolling Stones, The Who, Yardbirds 등이다. R & R이 미국으로부터 수입된지 10년만인 1966, 영국의 ROCK은 또다른 변신을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ART ROCK의 출현이다.

당시 Art School(예술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많은 청년들은 학교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Rock이나 Jazz, Blues Music에 심취하게 된다. Radio를 통해서, 아니면 학교 주변의 선술집, Club, Cafe등지에서 그들은 이러한 젊은이들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고, 결국 쉽게 빠질 수 있는 Rock Music에 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순수예술을 접목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음악학교 출신들 뿐만 아니라 건축, 디자인, 미술, 문학 등 여러 다른 예술 방면의 젊은이들도 함께 했다. 이들은 보헤미안(Bohemian : 자유분방한 예술가)으로 불리우며 ART ROCK이 탄생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사진작가, 디자이너, 극작가, 문학가 지망생 등 당시, 10여만명으로 추산되었던 Art School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순수예술 보다는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세계와 환경에 더욱 큰 지배를 받았다. 그들의 관심은 반핵운동, 마약, 비트문학, Jazz, Blues, Rock 등등으로 사회, 문화를 보는 시각이 먹고 살기에 바빴던 그들의 부모 세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당시 옷값과 레코드 가격은 그들 생활수준에 비하여 무척 저렴했고,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표현”에 있어서 Fashion Rock Music을 가장 이상적인 도구로 선택하게 된다. 유명한 그래픽 디자이너 “Pearce Marchbank는 영국의 1960년대 문화총체는 Art School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언할 정도로 1960년대 대중문화, 예술은 Art School 출신들에 의해서 리드 되었다.

 

LONDON : ART ROCK 발생지

Rock-Art-Rock.jpg“영국으로부터 ART ROCK이 탄생했다!” 이 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의 탄생이 무작정 1966년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몇몇의 보헤미안 들이나 Art School에 재학중이던 젊은이들은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ART ROCK에 가까운 창작활동을 구상해 왔기 때문에 1966년이 ART ROCK의 시발점이 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66년 도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러한 구상들이 실현화 되었고 표면화 되었기 때문에 이때 ART ROCK이 탄생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밀집되기 시작한 해도 1966년 이라는 접에서 ART ROCK의 시점을 1966년으로, 그 발상지를 런던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66년 봄, 수많은 뮤지션들, 시인들, 영화 감독들, 화가들 그리고 정치가 지망생들이 수도 런던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이러한 급작스러운 상황에 대하여 Time지는 “런던이 꿈틀거리고 있다”라는 커버스토리를 담기까지 했다. 이러한 문화, 사회적 대이동은 1920년대의 파리 그리고 1950년대의 로마를 방불케하는 것이었다. 또한, 여러 잡지들은 “런던이 불붙기 시작했다”라는 기사를 다루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런던이 대중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고 잇음을 암시하는 기사였다. 이와 발맞추어 미국에서는 평화와 사랑을 부르짓는 젊은이들, 일명 Flower People이라고 불리우는 젊은이들이 여러 지역으로부터 Wet Coast, 특히 San Francisco부근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발생하게되는 PSYCHEDELIC MUSIC은 영국의 ART ROCK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미국 서부의 PYSCHEDELIC MUSIC ART ROCK의 부류로 보는 평론가들도 상당수 있으며 대체적으로 PSYCHEDELIC MUSIC PROGRESSIVE ROCK 전체를 총칭하여 ART ROCK으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대적 배경

1966, 영국 런던은 문화적으로 매우 넓게 개방되어 있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음악 ROCK에 있어서는 과거 10년동안 그 어untitled.jpg느해 보다도 폭넓은 활동이 보장되어 있었다. 세게 제2차 대전으로 궁핍했었던 경제가 어느 정도 풍요를 되찾았고, Harold Wilson의 진보적인 신 노동정부가 국민들에게 이상적이고 낙천적인 삶을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Rock문화는 더욱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안정된 생활속에서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Beatles, Rolling Stones 그리고 Who와 같은 우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뜻깊은 해에 이러한 우상들은 지금까지 행하지 않았었던실험적이고 좀더 예술적 차원에 가까운 시도를 하게 된다. 인기관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만큼 그들의 인기는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표현의 자유를 시도할 수 있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Beatles는 ‘Rubber Soul’의 연장선상에서 그들 최초의 실험작 “Revolver”를 George Harrison Sitar와 몇몇 Tape 효과음과 스트링 쿼텟의 도입과 함께 완성시킨다. 이때부터 Beatles의 앨범 커버도 예술적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앨범 디자인은 Klaus Voorman: 1966년에 결성된 그룹 Paddy, Klaus And Gibson참고) Rolling Stones는 ‘Paint It Black’과 ‘Nineteenth Nervous Breakdown’등과 같은 사이코드라마를 연출시켰고 Who의 기타리스트 Pete Townshend Who의 무대에 강렬한 기타코드와 함께 Mod Fashion, Feedback효과 그리고 무정부를 그린 연극 효과와 비디오 효과 그리고 스모그폭탄을 도입했다. 그외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Donovan이 영국의 Bob Dylan이라는 별명을 들으며 새로운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Kinks Ray Davis도 영국적인 액센트로 영국적인 노래를 부르는 새로운 우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위에서 언급된 Kinks Ray Davis, Beatles John Lennon, Who Pete Twonshend, Rolling Stones Keith Richard 등은 모두 Art School출신들로 1966년을 기점으로 Art School에 재학중이거나 막 졸업했던 많은 후배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1966년 봄, 후에 최고의 ART ROCK그룹으로 부상하게 되는 Pink Floyd의 모체그룹 Pink Floyd Sound Spontaneous Underground라는 별칭을 들으며 급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은 같은해 12월에 문을 열게되는 ART ROCK Underground Music의 산실 UFO클럽을 통해 역사적인 데뷰를 하게 된다. 1958년에 문을 연 Marquee Club 1966년도부터 일요일 오후가 되면 ART ROCK을 행하는 신진 그룹들의 무대(Spontaneous Underground Session)를 만들었고, Royal Albert Hall도 이러한 그룹들처럼 ART ROCK을 행하는 그룹들을 무대에 초청했으며, Hall ART ROCK 그룹들의 연주를 지켜보려는 젊은 보헤미안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또한, 규율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 9대 명문학교 Charterhouse에서는 앞으로 영국 ART ROCK계를 이끌게 되는 새싹이 움트고 있었는데, 그것은 1966년 여름학기말 교정에서 The Anon Carden Wall Joint Concert로부터 비롯된다 이 두개의 그룹이 합쳐져 그 이듬해 1 Genesis라는 수퍼그룹이 결성되는 것이다.

 

변화

ART h90052eq0c9.jpgROCK이 탄생한 1966, 영국이 미국을 제치고 Rock의 리더임을 과시하게되는 1966년은 Rock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변환기를 의미하고 있다. Rock계에 이 한해동안 무수히 많은 이변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은 Yardbirds의 기타리스트 Eric Clapton이 만든 3인조 그룹 Cream의 결성이다. 지금껏 가장 인상적인 그룹 편성으로 알려져 왔던 4인조 편성의 아성을 깨고 3인조 그룹의 완벽성을 내걸고 등장한 Cream은 이때부터 ART ROCK의 효시로 일컬어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사운드는 ART ROCK이라기 보다는 Hard Rock과 흑인 Blues를 섞은 정통 Blues Rock에 더욱 가까웠다.

1966년말 또 하나의 강력한 3인조 그룹이 단탱했는데 그것은 바로 Jimi Hendrix가 이끄는 Jimi Hendrix Experience였다. Animals Chas Chandler에 의해서 뉴욕으로부터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온 흑인 기타리스트 Jimi Hendrix는 런던의 인기 TV프로그램 “Ready Steady Go”에 출연, 하얀 이빨로 기타줄을 뜯는 충격적인 연주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행위가 마치 ART ROCKdonovan.jpg 탄생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후 3인조 편성은 초창기 ART ROCK계열의 그룹에 있어서는 가장 표본이되는 기본적인 그룹편성이 되었다. 사실 1965년에 등장하기 시작한 3인조 Rock그룹 편성은 guitar를 내세우는 것이었지만 그 이듬해인 1967년부터는 키보드를 내세우는 3인조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967, Keith Emerson에 의해 결성되는 The Nice Guitar파트 대신 키보드를 내세우는 이른바 정통 ART ROCK의 그룹 편성을 정립시켰다. 물론, 같은해에 결성된 King Crimson의 모체인 Giles Giles & Fripp은 두개의 형태를 모두 포용한 그룹이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Cream 스타일의 멤버 구성을 고집했으나, Guest Musican으로 키보드 파트를 보강하는 독특한 방법을 채택했다. 역시 이때 등장했던 “Theater Rock”의 창시자 Arthur Brown의 그룹도 리드 보컬리스트인 자신을 배제하면 역시 3인조 ART ROCK그룹 편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1966년에 일어난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은 그해 여름 이후로 Beatles의 콘서트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앨범 “Revolver”이후 더욱 복잡해진사운드를 무대위에서 결코 재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틀즈의 사운드가 복잡해졌다는 것은 바로 영국의 Rock Music이 변화되고 있음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Underground DJ John Peel

디스크 쟈키가 ART ROCK, PROGRESSIVE ROCK, PSYCHEDELIC등등 비상업적인 음악을 대중매체인 Radio에 소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기관리, 청취율과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DJ가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비상업지향의 음악을 방송한다는 것느 위험한 선택일 수 밖에 없다. 1980년대초 국내에도 이와 비슷한 DJ가 있엇던 것 같다. 그리고 현재 고군분투하고 있는 분도 있다. 그분의 프로그램이 장수하기를...

본명이 John Ravenscroft John Peel Beatles처럼 Liver Pool출신으로 군복무를 마친뒤 1960년대초 미국으로 건너갔Peel.jpg, 그 곳에서 Radio DJ로 일하게 된다 그는 Beatles의 열풍이 전세계에 몰아칠 무렵 고국으로 되돌아 왔고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6년 그는 Musunderstood(1966년에 결성된 그룹)라는 그룹의 매니저로써 잠시 활동한 후 런던 근교의 배위에서 방송하는 불법, 해적 Radio방송의 DJ가 되었다. 그의 Radio프로그램 “Perfumed Garden"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늦은밤 프로그램으로 당시, 다른 기존 방송이 전혀 취급하지 않았던 영국, 미국의 Underground Music만을 방송해서 기존 방송, 기존 Pop Music에 식상해 있던 청취자들을 모두 끌어 모았다. 그의 Radio프로그램의 인기가 치속을 무렵 해적방송은 문을 닫았고 (1967년 중반, 영국 정보는 Marine Offence Act를 발동, 대부분의 해적 방송국은 이때 해체되었다.) 그는 Radio One에 스카웃되어 계속 방송하게 된다. Top Gear"라는 그의 새로운 프로그램은 당시 떠오르는 언더그라운드 그룹들을 수많은 청취자들에게 소개하는 장이 되어 주었는데, 그들중 T.Rex Marc Bolan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대표적인 인물이다. 1960년대말 그는 “Dandelion"이라는 조그만 레코드사를 설립하고 Briget ST.Jhon, Medicine Head 등의 앨범을 만들었으며, 그는 직접 Panama Limited, Toe Hat, Orange Bicycle등의 프로듀서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Underground 신문 IT(International Times)에 옛 프로그램명인 ”Perfumed Garden" 이라는 고정 컬럼을 쓰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그는 영국, 미국의 음악 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국가들의 Progressvier Rock그룹들을 영국에 소개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독일의 Tangerine Dream은 그의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영국 팬들을 확보, 영국에서 공연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Art Rock Magazine No. 5 (1993년 발행)

번호 제목 별명 조회 등록일
36 no image 무역 이론
웹마스터
3536 2013-02-24
말은 거창하지만 별 내용은 없습니다. 무역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할때 단순히 만들고 팔고가 아닌 어떤것을 어떻게 어디에 팔것인지에 관한것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는 일단 요즘 원정대의 주 무역품 생산지인 '초원의 띠'와 '하리하랄라야의 폐허' 이 두곳을 중심으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다른곳에서 무역을 준비하시는분들 역시 기본적인 방법은 같으니 참고하셔도 무방합니다. 먼저 무역품에 대해서 알아보 도록하겠습니다. - 초원의 띠 환약 : 모링가 열매(10개) + 특산품 인증서 - 초원의 띠 박하사탕 : 박하(100개) + 특산품 인증서 - 하리하랄라야 땅콩 잼 : 땅콩(40개) + 특산품 인증서 - 하리하랄라야 요리용 잎사귀 : 연꽃(50개) + 특산품 인증서 위의 4가지 품목에 대한 집중 분석을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무역품을 만들기 위해선 재료가 필요한데 재료를 입수하는 방법에는 1. 재배, 2. 구매 이 두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재배를 하는부분에 있어서는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특산물 재료구매 : 물가의 변동성 때문에 무역을 준비하는 바로 그시기에 구매하는것은 항상 변동하는 물가의 방향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때에 따라서는 두배가까이 가격이 차이나기도 하니까요. 경매장을 통한 물품 가격 변동폭 박하(100개) : 1.10골드 ~ 1.80골드 모링가나무열매(10개) : 1. 30골드 ~ 2.00골드 땅콩(100개) : 2.00골드 ~ 2.90골드 연꽃(100개) : 1.20골드 ~ 3.50골드 대략적인 경매장가격입니다. 원가기준을 잡을때 무역품 하나의 가격은 절대 2.00골드가 넘지 말아야 한다(이것은 저의 철칙입니다.) 그렇다면 특산품 인증서 가격(50실버)에 특산물의 가격은 절대 1.50골드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되죠. 땅콩과 연꽃은 가격대가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라 운반에 대한 부담은 있지만 특산품 제작에 1.50골드 이하로 까지 낮출수 있어서 나름 큰 메리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재료를 경매장을 통해 싼가격으로 올라올때 구매를 하고 미리 특산물을 제작한뒤 같이 무역을 할 분들을 모집하여 무역을 한다면 한결 수월할것이라 생각됩니다. *무역품 제작은 2골드 이하가 되도록 하라. 어디에 팔것인가... 이제 싼가격에 무역품을 제작하였다면 좋은가격에 팔아야겠지요? 물품을 팔곳은 5곳 정도로 정리가 되는데, 이니스테르(카오노르드), 두왕관(이즈나항구), 십자별평원(시차일드 부두), 긴모래톱(황금 혀 항구), 자유도 등입니다. 이곳외에도 있습니다만 판매가가 좋지않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 이니스테르(카어 노르드) (초원의 띠) 박하사탕 : 4g 67s(2g 33s ~ 7g ) 100% 기준에 50~150% 환약 : 4g 67s(2g 33s ~ 7g ) 100% 기준에 50~150% (하리하랄라야 폐허) 땅콩 잼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요리용 잎사귀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 두왕관(이즈나 항구) 박하사탕, 환약 : 5g 05s(2g 52s ~ 7g 57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5g 05s(2g 52s ~ 7g 57s) 100% 기준에 50~150% - 십자별 평원(시차일드 부두) 박하사탕, 환약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7g 07s(3g 53s ~ 10g 60s) 100% 기준에 50~150% - 긴모래톱(황금 혀 항구) 박하사탕, 환약 : 7g 07s(3g 53s ~ 10g 60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8g 50s(4g 25s ~ 12g 75s) 100% 기준에 50~150% 이상 4곳의 가격정보입니다. 자유도는 위험한 곳이라 저도 가격 확인 못했습니다 ^^ 하지만 제일 높은 가격을 받을수는 있으나 털릴 확률 80%에 팔수 있는 확률 5%, 15%는 배를 돌려 철수. 자유도는 소규모무역은 절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한곳(카오 노르드)를 제외한 나머지 3곳은 모두 서대륙에 위치한 판매처입니다. 패치로 인해 가격변동폭이 기존 80~120%에서 현재는 50% ~ 150% 변동이 된 상태입니다. 아마도 대량으로 가지고 가서 팔면 가격 폭락이 우려되오니 원정대 무역에서는 상품군을 다양화하는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설명은 어디까지나 소규모 무역(2~4명)선을 기준으로 한것으로 무역선 한대(무역품 20개)를 판다고 할경우엔 가격변동폭이 크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리없이 마구잡이로 쓰다보니 글내용이 두서가 없긴 합니다만 물품 구입과 판매에 대한 정보만 잘 확인하신다고 해도 도움이 도지 않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캔들무역상회--
35 no image 아답터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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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3 2012-10-19
34 no image Pulsa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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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8 2012-10-18
1970년대 후반 융성의 극을 달리던 프렌치 심포닉계도 1980년대로 들어설 무렵 완전히 동면상태로 들어가 버린다. 태반의 그룹들이 해산하고, 살아남은 소수의 그룹도 사운드를 변화시키고 만다. 그러한 가운데 유일하게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들의 사운드를 지켜낸 그룹이 있다. Pulsar의 역사는 오래전인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Lyon의 고등학교 밴드로 활동하고 있던 Free Sound라는 그룹에는 Phillipe Roman(b), Jacques Roman(Key), Gilbert Gandil(g, vo), Victor Bosch(ds)의 4인이 재적하고 있었다. 이 밴드는 당초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였는데 콘서트에서 공연하는 David Gilmour의 스테이지를 보고서 사운드 정책을 프로그레시브로 전환하게 된다. 1966년 그룹 결성 이해 여러 번 멤버 교체가 있었는데 1968년 전술한 4인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들은 본고장 Lyon에서 정력적으로 콘서트를 행하며 1970년 4월 Pulsar라 개명한다. 그리고 Malaval Festival, 이어서 1971년에는 그룹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Golf Druout에서의 콘테스트에 참가한다. 이콘테스트에서 성공을 거둔 그들은 프랑스 투어를 벌이면서 차츰 인기를 모아나갔다. 또 Golf Druout에서의 콘테스트를 수록한 옴니버스 앨범 <Groovy Pop Session>도 1972년 발매되어 Ange와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곡 “Pulsar”는 후의 그들의 사운드와는 다소 다르며 약가 헤비하고 혼탁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인기.실력을 한몸에 갖춘 그들은 1974년 12월 드디어 1집<Pollen>을 발매한다. 멤버는 전술한 4인에 플루트의 Roland Richard를 가입시킨 5인 편성이다. 곳곳에 Pink Floyd로부터의 영향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상력을 풍부히 가미한 섬세하고 몽환적인 부유감이 떠도는 사운드는 충분히 독창성을 감지할수 있는 아름답고 뛰어난 것이다. 팬 사이드에서도 이 앨범을 최고작으로 손꼽는 이가 적지 않다. 판매면에서도 일단 성공을 거둔 듯하다(이 앨범은 킹덤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고 영국에서도 호평을 얻었다고 한다.) 1집 발표후 그들은 약 1개월에 걸친 영국 투어를 행하여 호평를 얻고 대형 그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리고 1976년 4월, 2월 <The Strands of the Future>를 녹음한다. 이 앨범 제작시 베이스 Phillipe Roman이 탈퇴하고 게스트 형태로 참가하고 있다. Rock’n Folk지로부터 “이것은 풍부한 감성, 정렬로 충만한 대단히 뛰어난 앨범이다. Pulsar는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려온 최상의 완성도를 지닌 그룹이다. 위대한 인상파 작곡가 말러와 같은 서정성을 감지하게 한다”고 호평을 받은 이 앨범은 사운드 퀄리티에서 다소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SF적 부유감이 있는 A면의 대작, 서정적인 B면의 소품, 모두 그들의 독창성이 십분 발휘된 걸작이다. 판매면에서도 이 앨범은 대성공을 거두어 Ange, Atoll과 나란히 대형 그룹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2집 발표후 그들은 영국, 벨기에, 스위스, 포르투갈 등 장기간에 걸친 순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다. 이 인기를 눈으로 지켜본 프랑스 CBS는 좋은 조건을 내걸고 그들과 계약한다. 1977년 12월에 3집 <Halloween>이 발매된다. 베이스로 Michel Masson을 가입시킨 이 앨범은 오리지널 스토리에 기초한 토탈 컨셉트 앨범이며 플루트와 멜로트론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비교할 바 없는 서정성을 갖춘 최고의 걸작이다. 또 이 앨범에서 홍보용(적어도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레코드에는 Special Promotion이라 명기되어 있다) 싱글 “Sorrow In My Dream/Dawn Over Darkness”가 커트되었다. 이 앨범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자신넘치는 작품이었는데, 홍보 부족으로 말미암에 판매면에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3집 발표후 그들은 CBS를 떠나고 베이스로 탈퇴하여 활동이 부진하게 된다. 록계는 바야흐로 펑크, 뉴웨이브로 이행하고 있었으며그들에게는 겨울과 같은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980~81년에 걸쳐 Le Companie Du Theatre De La Satire라는 극단의 연극 세션을 맡았으며, 그 가운데 한 작품 “Bienvenue au Conseild Administraction”은 1982년 레코드화되고 있다. 컨템포러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데 Pulsar의 사운드는 건재하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들은 산발적으로 콘서트를 행하는등 활동을 계속하여 186년에는 Jacques Roman의 명의로 카세트 앨범 <Melodie Boreale>를 발매하였다. 릴랙스된 듯한 작품이지만 Pulsar 사운드의 아름다움만큼은 그대로 보존한 키보드워크는 그들의 사운드 정책이 지금도 불변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프렌치 심포닉 역사의 정도를 걸어온 그들의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33 no image Art Zoyd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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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7 2012-10-17
프랑스의 록계에 아르 조이라는 이름의 그룹이 등장한 것은 70년대 초두의 일이다. 71년 그들은 마이너 레이블 Opaline에서 싱글 “Sangria/Something in Love”를 발매하였다. 그것은 60년대 록게에서 가장 프로그레시브한 존재였던 크림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색소폰을 대담히 도입하는 등 독자적인 실험도 행한 의욕작이였다. 당시 그룹의 퍼스넬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상기 레코드에서 판단컨데 기타, 베이스, 드럼, 색소폰으로 구성된 5인조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싱글의 A면은 R.Fernandez의 작품, B면은 R.Frenandez와 J.P. Dulion의 공동작품이고 어레인지는 Alain Loewenguth로 되어있지만 그들의 그룹의 멤버였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76년 창설기의 멤버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아르 조이의 흐름을 이어받은 아르 조이 트르와(Art Zoyd 3)가 첫번째 앨범 <Symphonie Pour Le Jour Ou Bruleront Les Cites>를 발매하였다. Thierry Zaboitze(b, per, vo), Jean Pierre Soarez(Tp, per), Alain Eckert(g, per, vo), Gerard Hourbette(Vln, fl)의 4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 독창성 및 이후의 록계에 미친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70년대 프렌치 프로그레시브 록 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를 록의 테두리 내로 교묘히 끌어들인 연주를 전개하는 트럼팻과 바이올린, 변박자를 많이 사용한 곡제작 등은 챔버록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프랑스 남부 도시 툴루즈를 중심으로 다수의 라이브를 행하였다. 82년 영국 레코멘디드 레이블에서 발매된 싱글 “Manege”는 76년 2월 19일 팔레스 드 스포르트 듀 툴루즈에서 개막된 콘서트의 일부를 수록한 것이다. 그룹명을 다시 아르 조이로 되돌린 그들의 두번째 앨범<Musigue Pour L’Odyssee>는 유니베르 제로의 다니엘 데이스(ds), 미셀 베르그망(oboe, bassoon)을 게스트로 맞아들여 벨기에의 Overjse에서 녹음, 아템 레이블에서 발표되었다. 헨리 카우를 중심으로 하는RIO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들의 앨범은 레코멘디드 레이블을 통해 일본, 미국, 유럽 각국에 소개되어 그들의 이름을 일약 유명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80년 2월 스위스의 Kirchberg에 있는 Sunrise Studio에서 세번째 앨범 <Generation Sans Futur>를 제작한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템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도 다니엘 데니스가 가세한 작품이 1곡 수록되어 있는데 그 사운드는 전작의 아르 조이로서는 다소 클래식한 것에서 재즈적인 요소를 좀더 강조한 실험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다시, 같은 해 7월에는 자주제작 음반인 이유로 프레스 매수가 적어서 이미 입수가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린 첫번째 앨범을 재녹음하여 네번재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오리지널 음반의 멤버에 Frank Cardon(Vln), Patricia Dallio(p), Gilles Renard(sax)가 가세하여 제작된 이 작품은 음악적 완성도에 있어서 오리지널 음반을 월등히 상회하고 있다. 가장 음악적으로 충실한 시기를 맞이한 아르 조이였지만 아템 레이블이 그만 활동을 정지해 버린탓에 다섯번재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결국 영국의 레코멘디드 레이블에서 발매가 결정되어, 82년 4월~5월에 걸쳐서 녹음된 <Phase IV>는 더블앨범으로 재즈적 요소를 훌륭하게 승화시켜서 독자적인 챔버록으로 완성시킨, 아르 조이의 6년에 이르는 활동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한 작품이다. 83년에는 프랑스이 신흥 레이블 Cryonic에서 6집 <Escape Inquiets>를 발표 작품으로서의 힘이 다소 떨이지고 있지만 서서히 새로운 젙개를 추구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예상하던대로 84년 그들은 새로운 분야로 진출하였다. 우선 멤버의 한 사람인 Thierry Zaboitze가 극단 Le Collectif Theatral Du Hainaut의 <Promethee>를 위한 극장용 곡을 만들고, 그것을 솔로 앨범으로 발표하였다. 이어서 롤랑 프티의 창작 발레 “Le Mariage Du Ciel Et De L’enfant”에 그룹 차원으로 음악을 담당하여 그 일부를 7집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이들 작품은 그 성격상 음악적으로 종래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음악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2년이상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작을 내걸고 부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팬은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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