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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9 (22:34:55)

영국 ART ROCK의 역사 제2회 - ART SCHOOL
 
영국 ART SCHOOL의 성격
“1960년대 영국의 문화총체는 Art School에서 비롯되었다”라고 말했던 그래픽 디자이너 Marchbank의 말처럼 1966년경 Sketch_Club_Art_Centre_1953.jpgArt School학생들과 졸업생들에 의해 ART ROCK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게 되었고, 1960년대말과 1970년대 초에 황금기를 맞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1940년대와 1950년대 당시, 단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예술학교 학생들은 대학가의 주를 이루고 있었던 종합대학의 학생들과는 달리 학사, 석사, 박사등의 학위(Degree)가 아닌 기술과 능력을 인정받은 졸업장(Diploma)가 아닌 기술과 능력을 인정받음 졸업장(Diploma)하나만으로 사회에 진출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이 중하층의 집안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이었고 고상한 Classic을 즐길 수 없었던 반면 Jazz나 Blues는 그들의 상황과 정서에 가장 걸맞는 대중음악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5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Rock'n'Roll이 탄생했고 젊은이들의 상징적인 음악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나, 영국 예술학교의 젊은이들은 Rock'n'Roll보다는 Jazz나, Blues에 더욱 심취해 있었다.
1950년대말, Traditional Jazz붐이 영국을 강타했을 때 Art School의 재학생들이 가장 열심이었음은 두말할 것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Art School주변에는 Jazz와 Blues를 연주하는 클럽과 연주인들로 들끓고 있었다. 대모를 벌이는 경우에도 Art School학생들은 Rock'n'Roll이 아니라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부르며 거리를 행진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음악에 있어서는 Jazz와 Blues를, 정신적으로는 프랑스의 실천주의 철학을 문학에 있어서는 미국의 Beat문학을 추종하고 있었다. 또한 1950년대 대부분의 진보적인 Art과목들은 2차세계대전 이전의 독일 “Bauhaus"학파의 이론과 강의를 따르고 있었다.
1960ss대에 들어서면서 영국의 Art School에 대한 열기는 절정에 이른다. Art School의 설립이 눈에 띄게 증가했으며 기존 학교에서도 많은 새로운 과목들이 증설되기 시작했다.196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29개의 대규모 Art School과 56개의 소규모 학교가 존재햇었던 것에 반하여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런던과 그 외곽지역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많은 Art School이 건립되었다.
학생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Hornesy와 같은 Art School의 경우 1957년에는 단지 200명의 학생들이 있었던 반면 1960년대에는 약 4배에 달하는 860명이 이 학교를 드나들게 되었다. Art School의 확장으로 졸업생 수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었고 시대가 요구하는 젊은 예술인들이 각계층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를 만끽하고 기술을 익혔던 반면, 학구적인 것에는 강한 적대심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부유층들이나 귀족들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전형적인 환경에 만족하는 낙천주의 성격과 젊은 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을 결정지워 주는데에는 역시 Art School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상적인 배움터 ART SCHOOL
머리가 우수하거나 훌륭한 예술적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노동자계급과 저소득층의 자녀들은 Art School이야말로 그들의 뜻을 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장이었다. 대부분 예술학교 초년생들은 기초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훈cream.jpg련과 실험을 거친다. 특히 독특한 여러 실험들과 프로젝트들을 통해서 “무엇이 예술인가?”를 배운다. 여기에서 폭넓은 재료들과 기술들이 제공되어지며 그들은 머리로써 예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마음 그리고 느낌(잠재된 예술적인 능력을 끌어냄)으로써 무엇인가(예술)를 창출하는 것이다. Art School의 기초과정은 학생들의 능력을 분석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으로써 그들이 무엇에 관심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석, 판단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자마자 Art School로부터 대중음악계로 진출한 뮤지션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즉, 이 과정속에서 그들은 Rock음악이 그들에게 가장 커다란 관시미사이며, 자신이 그 어떤 것 보다도 Rock음악에 능력이 있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른 학구적인 과정이나 과목들과는 달리 Fine Art는 이론이나 구조적인 과정에 없매이는 것이 아니라 방법과 기술을 익히면 곧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분야이다. 즉, 그들은 도서관이나 강의실이나 세미나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스튜디오나 작업실에서 탐구의 실험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특히, 음악학교 출신들의 몇몇 젊은이들은 이때부터 정통적인 음악적 교육에서 벗어나려는 양상을 보였다. 연주실에서 악보에 그려진 기존선율, 고전음악을 연주하려하기 보다는 Club과 Cafe에서 들었던 Jazz, Blues의 즉흥성에 더욱 매료되었고, 젊음에 불타는 Rock Music에 혼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ART SCHOOL학생들의 사고와 관심사 - Liberalism(자유주의)
1977년 Jam의 데뷔앨범 “In The City"에 첫 곡으로 수록된 ‘Art School'이라는 곡은 1960년대말의 영국 Art School의 ”문langleyweb1.gif화적인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Jam의 멤버들은 Art School출신들은 아니었다.
The art college was the flaw in the British Education system, a space where both middle and working class youth could deny the implications of pass and future and live out, however briefly, a fantasy of cultural freedum.
이곡에서 Fantasy라는 단어는 자유가 예술학도들에 의해서 착각속에 즐겨지고 있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아무튼, 예술학도들에게 자유가 흘러 넘쳤음은 여러 ART ROCK그룹들의 멤버들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규율이 엄격한 다른 학교들에 비하여 예술학교는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잇는 특권을 부여해주었다. 이러한 자유는 심리적 자유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자유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낮에는 학교에서 면학을, 밤에는 클럽등지에서 젊음을 즐겼다. 또한, Rock이라는 젊음의 음악은 예술학교 학생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다. 용돈을 벌기위하여, 재료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아르바이트식의 아마추어 뮤지션으로써 출발한 뮤지션들이 어느덧 Rock Star로 변신해버린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장난삼아 그렸던 음반커버가 그후 그의 직업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Egoism(자유주의) + Politics(정치)
"표현적인 자유“를 만끽하게된 1960년대의 영국 Art School의 학생들은 자신의 작품이외에는 다른 것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의구심과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을 배워왔던 그들에게는 너무나 팽배하게 커져버린 사회를 부정하게 되었고, 기존의 규칙과 전통에 의구심을 갖는등 위험한길, 남들이 꺼리는 다른 길을 택하는 성향을 보였다. 이러한 것은 지나친 이기주의를 유발시켜 때로는 사회에 반감을 가지며 저항적인 자세, 반항아적인 기질을 싹트게 했다. 특히, Art School출신의 뮤지션들은 당시 젊은이들을 위하여 연주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즐기기위해, 자신들을 만족시키기위해 연주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분야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정당활동에 가담하는 특이한 양상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1960년대말에 들어와서는, 정치 캠페인에 참가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정치정당을 설립하는등의 활발한 정치활동도 벌였다. 1968년에는 급기야, 이념적인 Art School학생들이 학교를 점령하는 사태(Guildford 예술대학과 Hornesey 예술대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New Media(새로운 매체)
1960년대말 미술, 조각, 인쇄 분야에서 활약하던 예술학도들은 새로운 기술과 혁신의 힘을 얻어 사진, 영화 비디오 컴퓨터 그12800w_summeroflove5.jpg래픽등의 첨단기술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야에서 활약하다가 Rock Musican으로 전향한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무대와 Cover Arts 셰계에 새로운 Media를 수용하게 되었다. 특히 Art School출신으로써 ART ROCK, Psychedelic Rock그룹들 그리고 Punk그룹들과 함께 활약하게 되는 이들이 일명 Light Show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며 조명과 Dress Style을 포함한 모든 무대예술에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Media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Hornesey Collage Of Art의 “Light/Sound Workshop(1962년 설립)”에서 연구원으로 활약하던 Mike Leonard는 초창기 Pink Floyd의 360도 원형사운드와 무대영상의 개발에 크게 이바지한 바 있다.
 
DaDaism(허무주의)
1960년대 독일의 ART ROCK그룹들은 European Avant-Garde에서 영감을 얻었다. 특히, Berlin, Hanover, Paris, Zurich등에서 유행처럼 번져갔던 허무주의는 대중들에게 자극을 주거나 쇼크로써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럽의 많은 Avant-Garde Rock그룹들이 이러한 허무주의를 추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영국 ART ROCK그룹들 속으로 쉽게 파고들지는 못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서 Punk Rock이라는 새로운 Rock장르에 이르러 뒤늦게 정착된다. 여기에서 허무주의는 기형적으로 발전, 확산되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Shock Rock, Theater Rock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심리학자 Arthur Brown도 이러한 DaDaism에 다소 영향을 받았음이 사실이다.
 
Surrealism(초현실주의)
영국의 ART ROCK 그룹들은 DaDaism의 성향이 결여된 반면, 초현실주의 (Surrealism)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다. 실제로, 20세기 모든 Avant-Garde운동의 초현실주의는 대중음악과 광고분야에서 일하던 많은 디자이너들속에서 크게 일기dali-poster.jpg 시작했다. 스페인을 대표했던 화가 Salvador Dali의 재치가 넘치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Soft Watch Dreamscapes는 많은 레코드 커버 아티스트들과 삽화 아티스트들을 매료시켰고 Airbrush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이것은 1960년대말, 1970년대초의 수많은 Cover 아티스트들에 의해 도입된다. 허무주의처럼, 초현실주의도 그들의 청중들을 격분케 하거나 아연실색케 하는 것을 원했다. 또한 그들을 사회가 점차적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초현실주의 아티스트들은 예술적 혁명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당시로써는 매우 충격적이고 비상업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것이었지만 현시점에서는 그렇게 놀라울 것 없는 “이색적인 것의 하나”로 그 느낌이 반감된 것이 사실이며, 예상밖으로 지금까지 상업적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가져왔다.
또한 초현실주의는 세계를 이상하게 보이도록 만들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는데, 그중에 Erotic, Fantastic Art가 두드러졌으며 몽환적인 작품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Art School출신의 젊은 화가들, 디자이너들은 Erotic Cover, Fantastic Cover, Psychedelic Cover, Dreamy Cover등을 1960년대말부터 ART ROCK 그룹들을 위해, ART ROCK 그룹들이 행하는 음악과 걸맞는 앨범커버를 그리기 시작한다. ART ROCK을 행하는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뮤지션들도 무모한 모험을 즐겼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위해서라면 커다란 희생을 결코 아끼지 않았다. 예술성이 뛰어난 반면 상업적으로는 매우 눈이 어두웠던 그들은 오직 자신들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순수 자신들의 경비로 레코드를 제작, 그것에 만족하며 즐겼던 것이다.

Art School출신의 대표적인 뮤지션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뮤지션들중에는 Art School출신들이 의외로 많다. Daevid Allen(Gong), Syd Barrett(Pink Floyd), Jeff Beck, Eric Burdon(Animals), Brian Eno, Bryan Ferry(Roxy Music), John Foxx(Ultravox), John Lennon(Beatles), Lene Lovich, Freddie Mercury(Queen), hazel O'Conner, Jimmy Page(Led Zeppelin), keith Richard(Rolling Stones), Sade, Pete 쌔주노둥(Who) 등등...
biggrunt.jpgPete Townshend의 경우, 그는 Art School로부터 배웠던 것을 적절하게 표현해내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60년대초반 Earling College Of Arts에서 그래픽을 전공했는데, 그의 스승은 나찌 독일에서 탈출한 Gustav Metzger로써 Auto-Creative와 Auto-Destructive Art의 대가였다. Pete 쌔주노둥sms 그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고 그룹 Who의 공격적인 Sound와 기타를 부수는등의, 무대위에서의 난폭한 행위는 바로 그의 스승이 가르쳐준 Auto-Destructive Art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Pink Floyd의 경우, 멤버 전원이 예술학교와 건축학교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Syd Barrett은 Camberwell College Of Art에서 미술을 전공햇었고 Roger Waters와 Nick Mason은 Regent Street Polytechnic에서 건축을 배웠다. 후에 그들의 무대 공연이 Visual Art의 최첨단을 걷게 된다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여겨진다.
멤버들이 Art School과 강한 연결고리를 형성했던 그룹은 Bonzo Dog Doo Dah Band였다. Bonzo Dog은 1920년대 만화에 등장하는 동물이었으며 Doo Dah는 Dadaism(허무주의)를 변형시킨 단어로써 사용했는데 멤버 전원 모두 삽화(Illustration)를 전공한 Central School Of Art를 비롯한 런던 근교의 Art School출신들이었다. Brain Ferry는 1964년부터 1968년까지 New Castle대학에서 그 유명한 Pop Artist인 Richard Hamilton에게 Visual Arts를 사사받았다. 그의 예술적인 감각은 Roxy Music의 커버아트와 독특한 음악세계에서 잘 표출된다.
Brain Eno는 1971년 Roxy Music에 가담했을 때 전혀 악기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오직 Via Synthesizer와 Tape Recorder였다. 그는 원래 화가 지망생으로 John Cage와 Terry Riley등의 전위음악에 심취하면서 음악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의 은사는 화가겸 뮤지션이었던 Tom Phillips였다. Brain Eno의 솔로앨범 “Another Green World"는 바로 그의 스승 Tom Phillips의 그림 ”After Raphael"을 반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후 그는 음악과 미술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The Quiet Man"으로 알려진 John Foxx는 Royal College Of Art에서 삽화, 미술, College를 전공하면서 디자인 그룹이자 진보적인 음악 그룹 Ultravox를 결성했다. 그는 영국의 북부 공업도시 Lancashire에서 성장, 기게와 기술세대로서의 운명을 지녔다. 그의 음악과 디자인은 바로 기계와 기술혁신을 표출하고 있는데 그의 대표작 ‘I Want To Be A Machine'이라는 곡에서 충분히 그러한 성향이 반영되고 있다.
그 외에 많은 ART ROCK그룹들이 Art School주변에서 결성되었는데 그만큼 Art School은 ART ROCK그룹들이 형서되는데 가장 이상적인 장소였다. 당시, 젊음의 음악을 사랑하고, 자유를 갈구하며 학교에서 배워왔던 순수예술과 모든 과정들이 결함되어 수많은 ART ROCK그룹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뜻을 지닌 젊은이들이 의기투합될 수 있는 장소 Art School...! Gong의 창시자 Daevid Allen도 Canterbury College Of Art를 다니며 Rober Wyatt을 만날 수 있었고 Soft Machine을 결성할 수 있었다.
-편집자 주

Art Rock Magazine No. 6 (1994년 발행)
(원문에는 1967년 The Year Of Flower Power부분이 포함되어 있으나 이곳에는 옮기지 않았습니다.)

번호 제목 별명 조회 등록일
36 no image 무역 이론
웹마스터
3536 2013-02-24
말은 거창하지만 별 내용은 없습니다. 무역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할때 단순히 만들고 팔고가 아닌 어떤것을 어떻게 어디에 팔것인지에 관한것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는 일단 요즘 원정대의 주 무역품 생산지인 '초원의 띠'와 '하리하랄라야의 폐허' 이 두곳을 중심으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다른곳에서 무역을 준비하시는분들 역시 기본적인 방법은 같으니 참고하셔도 무방합니다. 먼저 무역품에 대해서 알아보 도록하겠습니다. - 초원의 띠 환약 : 모링가 열매(10개) + 특산품 인증서 - 초원의 띠 박하사탕 : 박하(100개) + 특산품 인증서 - 하리하랄라야 땅콩 잼 : 땅콩(40개) + 특산품 인증서 - 하리하랄라야 요리용 잎사귀 : 연꽃(50개) + 특산품 인증서 위의 4가지 품목에 대한 집중 분석을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무역품을 만들기 위해선 재료가 필요한데 재료를 입수하는 방법에는 1. 재배, 2. 구매 이 두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재배를 하는부분에 있어서는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특산물 재료구매 : 물가의 변동성 때문에 무역을 준비하는 바로 그시기에 구매하는것은 항상 변동하는 물가의 방향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때에 따라서는 두배가까이 가격이 차이나기도 하니까요. 경매장을 통한 물품 가격 변동폭 박하(100개) : 1.10골드 ~ 1.80골드 모링가나무열매(10개) : 1. 30골드 ~ 2.00골드 땅콩(100개) : 2.00골드 ~ 2.90골드 연꽃(100개) : 1.20골드 ~ 3.50골드 대략적인 경매장가격입니다. 원가기준을 잡을때 무역품 하나의 가격은 절대 2.00골드가 넘지 말아야 한다(이것은 저의 철칙입니다.) 그렇다면 특산품 인증서 가격(50실버)에 특산물의 가격은 절대 1.50골드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되죠. 땅콩과 연꽃은 가격대가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라 운반에 대한 부담은 있지만 특산품 제작에 1.50골드 이하로 까지 낮출수 있어서 나름 큰 메리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재료를 경매장을 통해 싼가격으로 올라올때 구매를 하고 미리 특산물을 제작한뒤 같이 무역을 할 분들을 모집하여 무역을 한다면 한결 수월할것이라 생각됩니다. *무역품 제작은 2골드 이하가 되도록 하라. 어디에 팔것인가... 이제 싼가격에 무역품을 제작하였다면 좋은가격에 팔아야겠지요? 물품을 팔곳은 5곳 정도로 정리가 되는데, 이니스테르(카오노르드), 두왕관(이즈나항구), 십자별평원(시차일드 부두), 긴모래톱(황금 혀 항구), 자유도 등입니다. 이곳외에도 있습니다만 판매가가 좋지않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 이니스테르(카어 노르드) (초원의 띠) 박하사탕 : 4g 67s(2g 33s ~ 7g ) 100% 기준에 50~150% 환약 : 4g 67s(2g 33s ~ 7g ) 100% 기준에 50~150% (하리하랄라야 폐허) 땅콩 잼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요리용 잎사귀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 두왕관(이즈나 항구) 박하사탕, 환약 : 5g 05s(2g 52s ~ 7g 57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5g 05s(2g 52s ~ 7g 57s) 100% 기준에 50~150% - 십자별 평원(시차일드 부두) 박하사탕, 환약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7g 07s(3g 53s ~ 10g 60s) 100% 기준에 50~150% - 긴모래톱(황금 혀 항구) 박하사탕, 환약 : 7g 07s(3g 53s ~ 10g 60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8g 50s(4g 25s ~ 12g 75s) 100% 기준에 50~150% 이상 4곳의 가격정보입니다. 자유도는 위험한 곳이라 저도 가격 확인 못했습니다 ^^ 하지만 제일 높은 가격을 받을수는 있으나 털릴 확률 80%에 팔수 있는 확률 5%, 15%는 배를 돌려 철수. 자유도는 소규모무역은 절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한곳(카오 노르드)를 제외한 나머지 3곳은 모두 서대륙에 위치한 판매처입니다. 패치로 인해 가격변동폭이 기존 80~120%에서 현재는 50% ~ 150% 변동이 된 상태입니다. 아마도 대량으로 가지고 가서 팔면 가격 폭락이 우려되오니 원정대 무역에서는 상품군을 다양화하는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설명은 어디까지나 소규모 무역(2~4명)선을 기준으로 한것으로 무역선 한대(무역품 20개)를 판다고 할경우엔 가격변동폭이 크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리없이 마구잡이로 쓰다보니 글내용이 두서가 없긴 합니다만 물품 구입과 판매에 대한 정보만 잘 확인하신다고 해도 도움이 도지 않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캔들무역상회--
35 no image 아답터주문
웹마스터
3223 2012-10-19
34 no image Pulsar (4)
웹마스터
4218 2012-10-18
1970년대 후반 융성의 극을 달리던 프렌치 심포닉계도 1980년대로 들어설 무렵 완전히 동면상태로 들어가 버린다. 태반의 그룹들이 해산하고, 살아남은 소수의 그룹도 사운드를 변화시키고 만다. 그러한 가운데 유일하게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들의 사운드를 지켜낸 그룹이 있다. Pulsar의 역사는 오래전인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Lyon의 고등학교 밴드로 활동하고 있던 Free Sound라는 그룹에는 Phillipe Roman(b), Jacques Roman(Key), Gilbert Gandil(g, vo), Victor Bosch(ds)의 4인이 재적하고 있었다. 이 밴드는 당초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였는데 콘서트에서 공연하는 David Gilmour의 스테이지를 보고서 사운드 정책을 프로그레시브로 전환하게 된다. 1966년 그룹 결성 이해 여러 번 멤버 교체가 있었는데 1968년 전술한 4인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들은 본고장 Lyon에서 정력적으로 콘서트를 행하며 1970년 4월 Pulsar라 개명한다. 그리고 Malaval Festival, 이어서 1971년에는 그룹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Golf Druout에서의 콘테스트에 참가한다. 이콘테스트에서 성공을 거둔 그들은 프랑스 투어를 벌이면서 차츰 인기를 모아나갔다. 또 Golf Druout에서의 콘테스트를 수록한 옴니버스 앨범 <Groovy Pop Session>도 1972년 발매되어 Ange와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곡 “Pulsar”는 후의 그들의 사운드와는 다소 다르며 약가 헤비하고 혼탁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인기.실력을 한몸에 갖춘 그들은 1974년 12월 드디어 1집<Pollen>을 발매한다. 멤버는 전술한 4인에 플루트의 Roland Richard를 가입시킨 5인 편성이다. 곳곳에 Pink Floyd로부터의 영향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상력을 풍부히 가미한 섬세하고 몽환적인 부유감이 떠도는 사운드는 충분히 독창성을 감지할수 있는 아름답고 뛰어난 것이다. 팬 사이드에서도 이 앨범을 최고작으로 손꼽는 이가 적지 않다. 판매면에서도 일단 성공을 거둔 듯하다(이 앨범은 킹덤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고 영국에서도 호평을 얻었다고 한다.) 1집 발표후 그들은 약 1개월에 걸친 영국 투어를 행하여 호평를 얻고 대형 그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리고 1976년 4월, 2월 <The Strands of the Future>를 녹음한다. 이 앨범 제작시 베이스 Phillipe Roman이 탈퇴하고 게스트 형태로 참가하고 있다. Rock’n Folk지로부터 “이것은 풍부한 감성, 정렬로 충만한 대단히 뛰어난 앨범이다. Pulsar는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려온 최상의 완성도를 지닌 그룹이다. 위대한 인상파 작곡가 말러와 같은 서정성을 감지하게 한다”고 호평을 받은 이 앨범은 사운드 퀄리티에서 다소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SF적 부유감이 있는 A면의 대작, 서정적인 B면의 소품, 모두 그들의 독창성이 십분 발휘된 걸작이다. 판매면에서도 이 앨범은 대성공을 거두어 Ange, Atoll과 나란히 대형 그룹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2집 발표후 그들은 영국, 벨기에, 스위스, 포르투갈 등 장기간에 걸친 순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다. 이 인기를 눈으로 지켜본 프랑스 CBS는 좋은 조건을 내걸고 그들과 계약한다. 1977년 12월에 3집 <Halloween>이 발매된다. 베이스로 Michel Masson을 가입시킨 이 앨범은 오리지널 스토리에 기초한 토탈 컨셉트 앨범이며 플루트와 멜로트론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비교할 바 없는 서정성을 갖춘 최고의 걸작이다. 또 이 앨범에서 홍보용(적어도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레코드에는 Special Promotion이라 명기되어 있다) 싱글 “Sorrow In My Dream/Dawn Over Darkness”가 커트되었다. 이 앨범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자신넘치는 작품이었는데, 홍보 부족으로 말미암에 판매면에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3집 발표후 그들은 CBS를 떠나고 베이스로 탈퇴하여 활동이 부진하게 된다. 록계는 바야흐로 펑크, 뉴웨이브로 이행하고 있었으며그들에게는 겨울과 같은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980~81년에 걸쳐 Le Companie Du Theatre De La Satire라는 극단의 연극 세션을 맡았으며, 그 가운데 한 작품 “Bienvenue au Conseild Administraction”은 1982년 레코드화되고 있다. 컨템포러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데 Pulsar의 사운드는 건재하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들은 산발적으로 콘서트를 행하는등 활동을 계속하여 186년에는 Jacques Roman의 명의로 카세트 앨범 <Melodie Boreale>를 발매하였다. 릴랙스된 듯한 작품이지만 Pulsar 사운드의 아름다움만큼은 그대로 보존한 키보드워크는 그들의 사운드 정책이 지금도 불변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프렌치 심포닉 역사의 정도를 걸어온 그들의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33 no image Art Zoyd (44)
웹마스터
4497 2012-10-17
프랑스의 록계에 아르 조이라는 이름의 그룹이 등장한 것은 70년대 초두의 일이다. 71년 그들은 마이너 레이블 Opaline에서 싱글 “Sangria/Something in Love”를 발매하였다. 그것은 60년대 록게에서 가장 프로그레시브한 존재였던 크림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색소폰을 대담히 도입하는 등 독자적인 실험도 행한 의욕작이였다. 당시 그룹의 퍼스넬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상기 레코드에서 판단컨데 기타, 베이스, 드럼, 색소폰으로 구성된 5인조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싱글의 A면은 R.Fernandez의 작품, B면은 R.Frenandez와 J.P. Dulion의 공동작품이고 어레인지는 Alain Loewenguth로 되어있지만 그들의 그룹의 멤버였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76년 창설기의 멤버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아르 조이의 흐름을 이어받은 아르 조이 트르와(Art Zoyd 3)가 첫번째 앨범 <Symphonie Pour Le Jour Ou Bruleront Les Cites>를 발매하였다. Thierry Zaboitze(b, per, vo), Jean Pierre Soarez(Tp, per), Alain Eckert(g, per, vo), Gerard Hourbette(Vln, fl)의 4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 독창성 및 이후의 록계에 미친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70년대 프렌치 프로그레시브 록 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를 록의 테두리 내로 교묘히 끌어들인 연주를 전개하는 트럼팻과 바이올린, 변박자를 많이 사용한 곡제작 등은 챔버록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프랑스 남부 도시 툴루즈를 중심으로 다수의 라이브를 행하였다. 82년 영국 레코멘디드 레이블에서 발매된 싱글 “Manege”는 76년 2월 19일 팔레스 드 스포르트 듀 툴루즈에서 개막된 콘서트의 일부를 수록한 것이다. 그룹명을 다시 아르 조이로 되돌린 그들의 두번째 앨범<Musigue Pour L’Odyssee>는 유니베르 제로의 다니엘 데이스(ds), 미셀 베르그망(oboe, bassoon)을 게스트로 맞아들여 벨기에의 Overjse에서 녹음, 아템 레이블에서 발표되었다. 헨리 카우를 중심으로 하는RIO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들의 앨범은 레코멘디드 레이블을 통해 일본, 미국, 유럽 각국에 소개되어 그들의 이름을 일약 유명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80년 2월 스위스의 Kirchberg에 있는 Sunrise Studio에서 세번째 앨범 <Generation Sans Futur>를 제작한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템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도 다니엘 데니스가 가세한 작품이 1곡 수록되어 있는데 그 사운드는 전작의 아르 조이로서는 다소 클래식한 것에서 재즈적인 요소를 좀더 강조한 실험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다시, 같은 해 7월에는 자주제작 음반인 이유로 프레스 매수가 적어서 이미 입수가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린 첫번째 앨범을 재녹음하여 네번재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오리지널 음반의 멤버에 Frank Cardon(Vln), Patricia Dallio(p), Gilles Renard(sax)가 가세하여 제작된 이 작품은 음악적 완성도에 있어서 오리지널 음반을 월등히 상회하고 있다. 가장 음악적으로 충실한 시기를 맞이한 아르 조이였지만 아템 레이블이 그만 활동을 정지해 버린탓에 다섯번재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결국 영국의 레코멘디드 레이블에서 발매가 결정되어, 82년 4월~5월에 걸쳐서 녹음된 <Phase IV>는 더블앨범으로 재즈적 요소를 훌륭하게 승화시켜서 독자적인 챔버록으로 완성시킨, 아르 조이의 6년에 이르는 활동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한 작품이다. 83년에는 프랑스이 신흥 레이블 Cryonic에서 6집 <Escape Inquiets>를 발표 작품으로서의 힘이 다소 떨이지고 있지만 서서히 새로운 젙개를 추구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예상하던대로 84년 그들은 새로운 분야로 진출하였다. 우선 멤버의 한 사람인 Thierry Zaboitze가 극단 Le Collectif Theatral Du Hainaut의 <Promethee>를 위한 극장용 곡을 만들고, 그것을 솔로 앨범으로 발표하였다. 이어서 롤랑 프티의 창작 발레 “Le Mariage Du Ciel Et De L’enfant”에 그룹 차원으로 음악을 담당하여 그 일부를 7집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이들 작품은 그 성격상 음악적으로 종래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음악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2년이상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작을 내걸고 부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팬은 적지 않을 것이다.
32 no image 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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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1 201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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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no image JBL L-15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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