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S Powered by DNSEver.com
추천 수 : 0 / 0
조회 수 : 3037
2009.01.28 (23:42:21)

영국 ART ROCK의 역사 제 10회

사회학 관점에서 바라 본 Progressive Rock
Progressive Rock의 쇠퇴기

 그동안 지루하게 (특히 필자에게) 여겨졌던 영국 ART ROCK의 역사가 이번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사실, 이 특집은 50회 정도로 에정되었으나 Art Rock Magazine이 제때 발간되지 못했기 때문에 필자가 환갑이 되더라도 이 특집이 끝날 것 같지 않고, 또한 새로운 특집의 기획으로 인하여 서둘러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럼, 새루운 특집이란? 비밀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Art Rock에서 다루지 않았던 미지의 음악에 관한 내용들이 소개될 것이다. (편집자 주)
 
 도서관에서 음악서적들을 열심히 뒤적거리던 학창시절, 대중음악과 사회학에 관한 책들이나 논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중 대부분이 반항적인 Rock 'n' Roll의 탄생과 당시 사회와의 관계를 다루거나, 사회적이거나 저항적인 Mordern Folk 그리고 자유, 반전, 평화와 사랑을 슬로우건으로 내걸었던 Psychedelic Music과 당시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를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Progressive Rock과 사회학을 다루었던 책이나 논문은 결코 찾아 볼 수 없었다.
 지난 여름, Edward Macan이라는 친구로부터 조그만 소포 하나가 도착되었다. 그 소포속에는 그가 오랫동안 집필해왔던 영국 Progressive Rock과 Counterculture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는데, 놀랍게되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영국 Progressive Rock에 대한 분석은 지금까지 영국에서 발간된 책들이나 논문들 보다도 체계적이고 날카로웠다. 다소 아쉬운점은 그의 분석이 대형 그룹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의 글들이 이 지면을 써내려가는 필자에게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사실, Progressvie Rock과 사회학에 대해서는 지난 Art Rock의 역사 제1회를 비롯한 초창기 글들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음악이 발생하게 된 동기와 배경 그리고 그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지면에서는 보다 심층적으로 Progressive Rock과 영국사회를 다루고자 한다.

EnglandMap.jpg


1. 영국 Progressive Rock의 사회 발상지
 영국 Progressive Rock의 사회적인 뿌리는 영국 남부에서 뻗어나왔으며 중산층과 대학가 그리고 영국 성공회(영국 국교회, Anglican Church)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첫 번째 지역으로 영국 나부지방중에서도 남쪽 Norfolk으로부터 동부 Essex, Cambridgeshire와 Lincolnshiredp 이르기까지 뻗어 나갔다. 그리고 두 번째 지역으로는 Kent 서쪽에서 Dorset, 북쪽으로는 Warwickshire까지 확산되었다. 세 번째 지역으로는 Cheshire와 Derbyshire 북부로부터 Yorkshire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포함한 Midlands 북부지역까지이다. 그리고 끝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국경지역, 즉 영국 북부지역까지 분포했다.
 영국 Progressive Rock의 주류는 역시 영국 남부에서 비롯되었는데, 1960년대말, 1970년에 결성된 대부분의 거물 그룹들이 이곳에서 결성되었다. 또한 1980년대 Neo-Progressive Rock 그룹들도 이곳에서 결성되어 그 맥을 이었다. 대부분의 주요 뮤지션들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1942년생부터 1950년생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자라났다. King Crimson의 리더 Robert Fripp(1946년생)을 비롯, 그동안 Art Rock의 역사에서 언급되었던 대부분의 주요 뮤지션들이 영국 남부출신들이다. 그렇다면 Progressive Rock은 왜 영국의 남부지방에서 탄생하여 그곳에서 발전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당시 영국 남부의 사회, 역사, 문화적인 여건을 살펴보면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영국의 남, 동부 지역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문적인 White-Collar들의 사회였다. 그에 반해 영국의 중부와 북부는 Working Class와 Blue Collar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실제로 Progressive Rock의 발생은 노동자층보다는 높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층의 자녀들 즉, Classic 음악교육 뿐만 아니라 높은 문화의 예술과 문학을 배웠던 젊은이들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에 영국 남부지역이 Progressive Rock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의 기여
 사회-지역적인 요인 뿐만 아니라 영국 Progressive Rock의 탄생에는 종교적인 영향이 적지 않았다. 미국의 R&B가 흑인 성가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영국의 Progressive Rock은 영국13.png 국교회와 카톨릭 성7c8.jpg가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의 영향은 지배적이었다.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로마 교황의 권위와 군주들간의 분쟁으로 발전했으며, 종교적인 불만으로 그 긴장감은 16세기 최고조에 이르른다. 헨리 8세의 이혼은 로마 교황과 결별을 야기(1534년) 시켰고, 영국의 교회들은 로마 카톨릭과 청교도로부터 대항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이래로 영국 성공회파(Anglican Communion)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성서와 교회의 권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운영체계는 교회 감독제이며 예배를 중시한다. 교리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교리를 수용하고 있므녀 1982년부터 로마카톨릭 교회와의 교류가 재개되었다.
 많은 Progressive Rock 뮤지션들이 어린시절 영국 국교회를 나갔으며, 그들중 교회 뮤지션으로 종사했었던 인물도 많다. 이러한 종교와 종교음악의 체험은 그들의 미래 음악에 무의식적으로든지 아니면 의식적으로든지 깊이 잠재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의 도입, 입체적인 코랄, 하모니 양식등등... 우리가 Progressive Rock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러한 음악적 요소들은 뮤지션들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종교적인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Genesis의 리더였던 Peter Gabriel은 소년시절 교회 소년합창단에 있었고, John Wetton은 자신의 형이 성가대 지휘자 및 오르간 주자로 활약하고 있을 때, 형의 보조로 일하면서 최초의 음악적 체험을 가졌다. 또한 Yes의 Chris Squire는 성 앤드류 성당의 소년 성개대에 있었으며, Soft Machine의 Mike Ratlledge는 캔터베리 성당의 오르간주자로부터 오르간 연주를 배웠다. 스위스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Patrick Moraz도 Bournrmouth지역의 교회에서 오르간 주자로 활약했었다. King Crimson의 Robert Fripp은 종종 Anglican성가 음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작곡가 Orlando Gibbons의 성가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Keith Emerson 또한 인터뷰를 통해서 이러한 종교적 배경에 대하여 여러차례 언급한 바 있다. V.D.G.G.의 Peter Hammill은 영국 국교회 보다는 카톨릭 출신으로 양쪽 Anglican과 Catholic 교회를 위한 음악들을 작곡해TEjs 영국 르네상스 성가 음악들을 작곡했던 영국 르네상스 성가 음악의 거장 Thomas Tallis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Progressive Rock Mania
 모든 부류의 damdkr들에 특정팬들, 극성 팬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Progressive Rock팬들은 타 장르의 Mania와 뚜렷이 구별된다. 우선, 영국의 Progressive Rock의 탄생기와 첫 번째 황금기 (1966~1970년대초)의 매니아들은 뮤지션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뮤지션들과 같은 세대들(20대부터 30대까지)이었으며 그들 대부분이 영국 남동부에 거주했고, 사회-경제적으로 넉넉한 중산층들로 High Culture의 예술, 문학과 음악을 전공하던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Progressive Rock 매니아들 중에서 우리는 쉽게 Progressive Rock뮤지션들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매니아 자신이 여러 형태의 Contributor로, Volunteer로서 참여하고 있다. 앨범과 공연 티켓의 구입등의 경제적 공헌 뿐만 아니라, 앨범과 팜플렛 디자인, 무대디자인 더 나아가서 앨범의 가사, 그룹의 보이지 않는 멤버로도 활약했다. 당시 뮤지션들과 Mania들의 관계는 친밀한 친구 관계였고, 서로 음악을 연주하고, 듣고, 평가하는 자연스러운 장이 열려 있었다. 실예로 1966년부터 런던 Marquee Club에서 개최도있던 “Spontaneous Underground" 씨리즈는 연주자와 청중과의 구별을 짓는 궇획선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1960년대말까지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Pink Floyd, Nice, Soft Machine 그리고 Procol Harum등의 멤버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다.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초까지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Progressive Rock Mania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연주자들의 무대가 영국 런던의 조그만 Club이나 Pub(클럽)등지에서 미국의 커다란 Arena나 Stadium(경기장, 큰 공연장)등지로 옮겨졌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영국 PrQ85.jpgogressive Rock그룹들의 미국시장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다. Moody Blues, Pink Floyd, EL & P, Yes 그리고 Jethro Tull등이 그 행운의 주인공들이었다.
1970년대 초반, Progressive Rock Mania들은 직접 공연장을 찾는 것 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집에 모여 음반을 감상하거나 무명그룹들의 공연장을 찾기 시작한다. 이때 제 2의 Pink Floyd, Yes, Genesis 그리고 Jethro Tull을 꿈꾸는 수많은 그룹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중에는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빛을 못보고 사라진 그룹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 자체가 Progressive Rock Mania로 출발 Progressive Rock Musican이 되었고 그리고 Progressive Rock Mania로 되돌아 가게 된다.

Progressive Rock의 상업적 성공과 혼란(1970년대 중반까지)
 위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행운의 그룹들(소위 수퍼그룹)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조그만 클럽에서 소수의 청중들 앞에서 공연을 했던 영국 그룹들이,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대형 공연장에서 수천, 수만명의 청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Progressive Rock계열의 음반 판매고도 천문학적 숫자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1973년 3월 발매된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이 분야의 최고 판매고를 기록하며 Pink Floyd의 멤버들에게 엄청난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멤버들 모두 그리스의 섬에 휴양 빌라를 구입할 수 있었고, Roger Waters는 값비싼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수집할 수 있었으며, Nick Mason은 그동안 해왔던 자동차 수집에 더욱 열을 올릴 수 있었다. 쌓여가는 부와 함께 David Gilmour는 Guitar수집에, Rick Wright는 골동품 수집에 깊히 빠져들었다. 1980년대초 멤버들 간의 갈등 (Roger Waters와 나머지 멤버들 간의)으로 그들의 명예는 다소 실추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들은 부를 누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분야에서의 대표적인 행운아이자 불운아는 Mike Oldfield이다 그는 청소년 464.jpg시절, 틈틈이 작곡해왔던 Tubular Bells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Virgin Records의 창업자인 Simon Draper와 Richard Branson은 그의 데모테잎을 듣고 그를 스튜디오로 불러들였다. 그후 2,000회 이상의 오버더빙 끝에, 9개월만에 당시의 화제작 Turbular Bells는 완성되었다. 그 중 4분여되는 분량의 공포영화 엑소시스트의 테마 음악으로 사용되었고, 이 작품은 Headphone Rock으로 불리우며,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1,6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러나 레코드회사의 게약 때문에, 지속적으로 음반을 제작해야 되었고(그는 레코드 게약은 법정에서 형을 구형받은 것과 다를바 없다라고 말한다). 잇다른 음반 판매부진과 규모가 큰 무리한 공연으로 그가 잠시 얻었던 엄청난 부는 빚으로 바뀌게 되었다. 1982년 “Five Miles Out"에 수록된 Family Man이 엉뚱하게도 Hall And Qates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히트하자 그는 ”Pop Song"을 만드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지루하다“라고 표명했고 1984년 영화 사운드 트랙 ”The Killing Fields"로 잠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의도로 20년만에 발표된 “Turbular Bells 2"는 기대이상의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Progressive Rock그룹들은 활동을 중지한다. 이러한 공백기의 주요 원인은 그들 대부분의 음악적 방향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소속 멤버들은 그룹활동을 중지하고, 솔로 활동을 하거나 그룹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이렇게 황혼기에 접어든 영국 Progressvie rock계genesis_pic_book.jpg와는 달리 이태리,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Progressive Rock계는 황금기를 맞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퍼그룹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대중성과의 타협을 시작한다. Peter Gabriel은 뮤지컬 스타일의 더블 앨범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의 발표와 함께 102차례의 순회 공연을 가진 후 Genesis를 떠나게 되는데, Peter Gabriel이 떠난 Genesis는 더 이상 Progressive Rock그룹이 아니라 Pop그룹에 가까웠다. 몇몇 수퍼그룹들을 제외하고대부분의 그룹들이아 아티스트들은 새롭게 불어오는 음악조류에 편승하게 된다. 1970년대 초반에는 많은 Pop Artist들도 거세게 몰아닥치는 Progressive Rock에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70년대 중반부터 Progressive Rock그룹과 아티스트들도 상업성에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 Punk Rock의 출현, Disco의 열풍등으로 Progressvie Rock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갔고 Progressive Rock의 주류(Mainstream)는 이때부터 1990년대 몇몇 북구 신생그룹들로부터 일어났던 ”과거로의 귀환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맥이 끊어지게 된다.

1976년부터 1970년대말까지
 1975년부터 King Crimson은 활동을 중지했고, Genesis는 Phil Collins가 Peter Gabriel의 역할을 해나가면서 급작스럽게 Pop그룹으로 변모해갔다. Pink Floyd는 두 번째 휴지기를 맞으며 Roger Waters의 솔로 프로젝트 그룹으로 점차 전락하기 시작했으1030.jpg며, Yes 역시 공백기를 맞으며 Jon Anderson을 비롯 각 멤버들이 자신의 솔로앨범 제작에만 몰두했다. 영국 Progressive Rock의 공황기인 1975년과 1976년, 이 휴지기 동안에는 수퍼 그룹들의 Best앨범, 실황음반들만이 쏟아져 나왔고 영국 Progressive Rock의 역사를 간신히 연명해 나가는 시기였다. 다만, Jethro Tull과 V.D.G.G. 그리고 Hen교 Cow등만이 이 기간에 폭넓은 활동을 벌였을 뿐이다.
 1976년 여름, Punk가 런던을 강타했고, 1976년말부터 1977년까지 Disco가 전 세계 음악시장을 휩쓸면서 Progressive Rock시장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이 기간은 각 그룹의 음악적 분기점이기도 했다. Pop지향으로 돌아선 Genesis에 이어 EL & P가 “Works I"을 발표한 직후 ”Works II"와 함께 사향길을 걷기 시작한다. Renaissance는 “Novella"와 ”A Song For All Season"를 발표한 후 Pop그룹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중 UK의 출현은 영국 Progressive Rock의 끈질긴 생명력을 실감하게 했다.ELO201.jpg
 이에 반해, 영국 Progressive Rock의 쇠퇴기에 적절히 상업성을 띤 Pomp Rock(Symphoni Pop, Orchestral Pop)계열의 그룹들은 이 시기에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Electric Light Orchestra, Supertramp, The Alan Parsons Project등은 Progressive Rock 그룹들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 상업성까지 강하게 함축하고 있었다. 1971년 버밍햄에서 결성된 E.L.O.는 Move의 후신 그룹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E.L.O.는 라이브 무대에서 시청각을 중요시하는 Progressive Rock으 전형적인 라이브 무대를 연출하기도 했고, 역시 Pop에 Classic을 도입 가벼운 Progressive Rock스타일을 유지하여 보다 쉽게 청중들에 다가 설 수 있었다. 1960년대말에 결성된 Supertramp는 1970년대 중반부터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역시 상업성이 깃든 가벼운 스타일의 Progressive Rock을 행하면서 “Even In The Quietest Moments(1977)"와 ”Breakfast In America(1979)“등의 앨범들로 전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엔지니어, 제작자로 유명한 Alan Parsons에 의해 결성된 프로젝트 팀 The Alan Parsons Project 역시 영국 Progressive Rock의 쇠퇴기에 결성되어 가벼운 Progressive Rock스타일로 성공한 대표적인 그룹이었다.

1980년, Neo-Progressive Band의 출현
 국내 FM방송에서 본격적으로 Progressive Rock이 소개되기 시작AlanEriclarge.jpg했을 때, Progressive Rock의 종주국 영국에서는 Neo-Progressive Band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The Silmarillion(후에 Marillion), IQ, Pallas, Zeus Pendragon(후에 Pendragon), Art, Solstice, Twelfth Night등등이 대표적인 그룹들이다. 이들은 영국 남부에서 대부분 결정되었던 선배 그룹들과는 달리 보다 폭넓은 지역에서 결성되었으며 주로 대학가에서만 인기를 누렸다. Twelfth Night은 Reading대학 출신들로 리딩에서 결성되었고, IQ는 Southampton에서, Zeus Pendragon은 Gloucestershire에서, Silmarillion은 옥스퍼드 근교 Aylesbury지역에서 그리고 Pallas는 스코틀랜드 수도 Glasgow에서 결성되었다. 선배들이 1960년대 말에 활약했었던 런던의 Marquee클럽이 역시 이들의 주요무대가 되어주었는데 Solstice만을 제외하고 이들의 사운드는 Peter Gabriel이 이끌었던 Genesis전성기 시절의 음악을 표방했다. 10년전 선배들과 이들의 사운드가 확연히 다른점은 보컬이 Punk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과, 연주가 1980년대초 New Wave처럼 보다 Electric Sound가 강조되었다는 점 그리고 여러 면에서 사운드가 단순해졌다는 점이다. 가사나 스케일면에서도 간단 명료해졌으며, 사운드가 보다 기계적이며 차갑다. 선배가 아날로그라면 후배인 Neo-Progressive Rock Band는 디지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통 Progressive Rock과 Neo-Progressive Rock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다. 서로 별개의 음악 영역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번호 제목 별명 조회 등록일
36 no image 무역 이론
웹마스터
3536 2013-02-24
말은 거창하지만 별 내용은 없습니다. 무역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할때 단순히 만들고 팔고가 아닌 어떤것을 어떻게 어디에 팔것인지에 관한것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는 일단 요즘 원정대의 주 무역품 생산지인 '초원의 띠'와 '하리하랄라야의 폐허' 이 두곳을 중심으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다른곳에서 무역을 준비하시는분들 역시 기본적인 방법은 같으니 참고하셔도 무방합니다. 먼저 무역품에 대해서 알아보 도록하겠습니다. - 초원의 띠 환약 : 모링가 열매(10개) + 특산품 인증서 - 초원의 띠 박하사탕 : 박하(100개) + 특산품 인증서 - 하리하랄라야 땅콩 잼 : 땅콩(40개) + 특산품 인증서 - 하리하랄라야 요리용 잎사귀 : 연꽃(50개) + 특산품 인증서 위의 4가지 품목에 대한 집중 분석을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무역품을 만들기 위해선 재료가 필요한데 재료를 입수하는 방법에는 1. 재배, 2. 구매 이 두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재배를 하는부분에 있어서는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특산물 재료구매 : 물가의 변동성 때문에 무역을 준비하는 바로 그시기에 구매하는것은 항상 변동하는 물가의 방향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때에 따라서는 두배가까이 가격이 차이나기도 하니까요. 경매장을 통한 물품 가격 변동폭 박하(100개) : 1.10골드 ~ 1.80골드 모링가나무열매(10개) : 1. 30골드 ~ 2.00골드 땅콩(100개) : 2.00골드 ~ 2.90골드 연꽃(100개) : 1.20골드 ~ 3.50골드 대략적인 경매장가격입니다. 원가기준을 잡을때 무역품 하나의 가격은 절대 2.00골드가 넘지 말아야 한다(이것은 저의 철칙입니다.) 그렇다면 특산품 인증서 가격(50실버)에 특산물의 가격은 절대 1.50골드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되죠. 땅콩과 연꽃은 가격대가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라 운반에 대한 부담은 있지만 특산품 제작에 1.50골드 이하로 까지 낮출수 있어서 나름 큰 메리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재료를 경매장을 통해 싼가격으로 올라올때 구매를 하고 미리 특산물을 제작한뒤 같이 무역을 할 분들을 모집하여 무역을 한다면 한결 수월할것이라 생각됩니다. *무역품 제작은 2골드 이하가 되도록 하라. 어디에 팔것인가... 이제 싼가격에 무역품을 제작하였다면 좋은가격에 팔아야겠지요? 물품을 팔곳은 5곳 정도로 정리가 되는데, 이니스테르(카오노르드), 두왕관(이즈나항구), 십자별평원(시차일드 부두), 긴모래톱(황금 혀 항구), 자유도 등입니다. 이곳외에도 있습니다만 판매가가 좋지않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 이니스테르(카어 노르드) (초원의 띠) 박하사탕 : 4g 67s(2g 33s ~ 7g ) 100% 기준에 50~150% 환약 : 4g 67s(2g 33s ~ 7g ) 100% 기준에 50~150% (하리하랄라야 폐허) 땅콩 잼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요리용 잎사귀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 두왕관(이즈나 항구) 박하사탕, 환약 : 5g 05s(2g 52s ~ 7g 57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5g 05s(2g 52s ~ 7g 57s) 100% 기준에 50~150% - 십자별 평원(시차일드 부두) 박하사탕, 환약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7g 07s(3g 53s ~ 10g 60s) 100% 기준에 50~150% - 긴모래톱(황금 혀 항구) 박하사탕, 환약 : 7g 07s(3g 53s ~ 10g 60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8g 50s(4g 25s ~ 12g 75s) 100% 기준에 50~150% 이상 4곳의 가격정보입니다. 자유도는 위험한 곳이라 저도 가격 확인 못했습니다 ^^ 하지만 제일 높은 가격을 받을수는 있으나 털릴 확률 80%에 팔수 있는 확률 5%, 15%는 배를 돌려 철수. 자유도는 소규모무역은 절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한곳(카오 노르드)를 제외한 나머지 3곳은 모두 서대륙에 위치한 판매처입니다. 패치로 인해 가격변동폭이 기존 80~120%에서 현재는 50% ~ 150% 변동이 된 상태입니다. 아마도 대량으로 가지고 가서 팔면 가격 폭락이 우려되오니 원정대 무역에서는 상품군을 다양화하는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설명은 어디까지나 소규모 무역(2~4명)선을 기준으로 한것으로 무역선 한대(무역품 20개)를 판다고 할경우엔 가격변동폭이 크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리없이 마구잡이로 쓰다보니 글내용이 두서가 없긴 합니다만 물품 구입과 판매에 대한 정보만 잘 확인하신다고 해도 도움이 도지 않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캔들무역상회--
35 no image 아답터주문
웹마스터
3223 2012-10-19
34 no image Pulsar (4)
웹마스터
4218 2012-10-18
1970년대 후반 융성의 극을 달리던 프렌치 심포닉계도 1980년대로 들어설 무렵 완전히 동면상태로 들어가 버린다. 태반의 그룹들이 해산하고, 살아남은 소수의 그룹도 사운드를 변화시키고 만다. 그러한 가운데 유일하게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들의 사운드를 지켜낸 그룹이 있다. Pulsar의 역사는 오래전인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Lyon의 고등학교 밴드로 활동하고 있던 Free Sound라는 그룹에는 Phillipe Roman(b), Jacques Roman(Key), Gilbert Gandil(g, vo), Victor Bosch(ds)의 4인이 재적하고 있었다. 이 밴드는 당초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였는데 콘서트에서 공연하는 David Gilmour의 스테이지를 보고서 사운드 정책을 프로그레시브로 전환하게 된다. 1966년 그룹 결성 이해 여러 번 멤버 교체가 있었는데 1968년 전술한 4인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들은 본고장 Lyon에서 정력적으로 콘서트를 행하며 1970년 4월 Pulsar라 개명한다. 그리고 Malaval Festival, 이어서 1971년에는 그룹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Golf Druout에서의 콘테스트에 참가한다. 이콘테스트에서 성공을 거둔 그들은 프랑스 투어를 벌이면서 차츰 인기를 모아나갔다. 또 Golf Druout에서의 콘테스트를 수록한 옴니버스 앨범 <Groovy Pop Session>도 1972년 발매되어 Ange와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곡 “Pulsar”는 후의 그들의 사운드와는 다소 다르며 약가 헤비하고 혼탁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인기.실력을 한몸에 갖춘 그들은 1974년 12월 드디어 1집<Pollen>을 발매한다. 멤버는 전술한 4인에 플루트의 Roland Richard를 가입시킨 5인 편성이다. 곳곳에 Pink Floyd로부터의 영향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상력을 풍부히 가미한 섬세하고 몽환적인 부유감이 떠도는 사운드는 충분히 독창성을 감지할수 있는 아름답고 뛰어난 것이다. 팬 사이드에서도 이 앨범을 최고작으로 손꼽는 이가 적지 않다. 판매면에서도 일단 성공을 거둔 듯하다(이 앨범은 킹덤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고 영국에서도 호평을 얻었다고 한다.) 1집 발표후 그들은 약 1개월에 걸친 영국 투어를 행하여 호평를 얻고 대형 그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리고 1976년 4월, 2월 <The Strands of the Future>를 녹음한다. 이 앨범 제작시 베이스 Phillipe Roman이 탈퇴하고 게스트 형태로 참가하고 있다. Rock’n Folk지로부터 “이것은 풍부한 감성, 정렬로 충만한 대단히 뛰어난 앨범이다. Pulsar는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려온 최상의 완성도를 지닌 그룹이다. 위대한 인상파 작곡가 말러와 같은 서정성을 감지하게 한다”고 호평을 받은 이 앨범은 사운드 퀄리티에서 다소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SF적 부유감이 있는 A면의 대작, 서정적인 B면의 소품, 모두 그들의 독창성이 십분 발휘된 걸작이다. 판매면에서도 이 앨범은 대성공을 거두어 Ange, Atoll과 나란히 대형 그룹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2집 발표후 그들은 영국, 벨기에, 스위스, 포르투갈 등 장기간에 걸친 순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다. 이 인기를 눈으로 지켜본 프랑스 CBS는 좋은 조건을 내걸고 그들과 계약한다. 1977년 12월에 3집 <Halloween>이 발매된다. 베이스로 Michel Masson을 가입시킨 이 앨범은 오리지널 스토리에 기초한 토탈 컨셉트 앨범이며 플루트와 멜로트론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비교할 바 없는 서정성을 갖춘 최고의 걸작이다. 또 이 앨범에서 홍보용(적어도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레코드에는 Special Promotion이라 명기되어 있다) 싱글 “Sorrow In My Dream/Dawn Over Darkness”가 커트되었다. 이 앨범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자신넘치는 작품이었는데, 홍보 부족으로 말미암에 판매면에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3집 발표후 그들은 CBS를 떠나고 베이스로 탈퇴하여 활동이 부진하게 된다. 록계는 바야흐로 펑크, 뉴웨이브로 이행하고 있었으며그들에게는 겨울과 같은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980~81년에 걸쳐 Le Companie Du Theatre De La Satire라는 극단의 연극 세션을 맡았으며, 그 가운데 한 작품 “Bienvenue au Conseild Administraction”은 1982년 레코드화되고 있다. 컨템포러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데 Pulsar의 사운드는 건재하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들은 산발적으로 콘서트를 행하는등 활동을 계속하여 186년에는 Jacques Roman의 명의로 카세트 앨범 <Melodie Boreale>를 발매하였다. 릴랙스된 듯한 작품이지만 Pulsar 사운드의 아름다움만큼은 그대로 보존한 키보드워크는 그들의 사운드 정책이 지금도 불변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프렌치 심포닉 역사의 정도를 걸어온 그들의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33 no image Art Zoyd (44)
웹마스터
4497 2012-10-17
프랑스의 록계에 아르 조이라는 이름의 그룹이 등장한 것은 70년대 초두의 일이다. 71년 그들은 마이너 레이블 Opaline에서 싱글 “Sangria/Something in Love”를 발매하였다. 그것은 60년대 록게에서 가장 프로그레시브한 존재였던 크림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색소폰을 대담히 도입하는 등 독자적인 실험도 행한 의욕작이였다. 당시 그룹의 퍼스넬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상기 레코드에서 판단컨데 기타, 베이스, 드럼, 색소폰으로 구성된 5인조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싱글의 A면은 R.Fernandez의 작품, B면은 R.Frenandez와 J.P. Dulion의 공동작품이고 어레인지는 Alain Loewenguth로 되어있지만 그들의 그룹의 멤버였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76년 창설기의 멤버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아르 조이의 흐름을 이어받은 아르 조이 트르와(Art Zoyd 3)가 첫번째 앨범 <Symphonie Pour Le Jour Ou Bruleront Les Cites>를 발매하였다. Thierry Zaboitze(b, per, vo), Jean Pierre Soarez(Tp, per), Alain Eckert(g, per, vo), Gerard Hourbette(Vln, fl)의 4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 독창성 및 이후의 록계에 미친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70년대 프렌치 프로그레시브 록 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를 록의 테두리 내로 교묘히 끌어들인 연주를 전개하는 트럼팻과 바이올린, 변박자를 많이 사용한 곡제작 등은 챔버록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프랑스 남부 도시 툴루즈를 중심으로 다수의 라이브를 행하였다. 82년 영국 레코멘디드 레이블에서 발매된 싱글 “Manege”는 76년 2월 19일 팔레스 드 스포르트 듀 툴루즈에서 개막된 콘서트의 일부를 수록한 것이다. 그룹명을 다시 아르 조이로 되돌린 그들의 두번째 앨범<Musigue Pour L’Odyssee>는 유니베르 제로의 다니엘 데이스(ds), 미셀 베르그망(oboe, bassoon)을 게스트로 맞아들여 벨기에의 Overjse에서 녹음, 아템 레이블에서 발표되었다. 헨리 카우를 중심으로 하는RIO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들의 앨범은 레코멘디드 레이블을 통해 일본, 미국, 유럽 각국에 소개되어 그들의 이름을 일약 유명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80년 2월 스위스의 Kirchberg에 있는 Sunrise Studio에서 세번째 앨범 <Generation Sans Futur>를 제작한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템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도 다니엘 데니스가 가세한 작품이 1곡 수록되어 있는데 그 사운드는 전작의 아르 조이로서는 다소 클래식한 것에서 재즈적인 요소를 좀더 강조한 실험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다시, 같은 해 7월에는 자주제작 음반인 이유로 프레스 매수가 적어서 이미 입수가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린 첫번째 앨범을 재녹음하여 네번재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오리지널 음반의 멤버에 Frank Cardon(Vln), Patricia Dallio(p), Gilles Renard(sax)가 가세하여 제작된 이 작품은 음악적 완성도에 있어서 오리지널 음반을 월등히 상회하고 있다. 가장 음악적으로 충실한 시기를 맞이한 아르 조이였지만 아템 레이블이 그만 활동을 정지해 버린탓에 다섯번재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결국 영국의 레코멘디드 레이블에서 발매가 결정되어, 82년 4월~5월에 걸쳐서 녹음된 <Phase IV>는 더블앨범으로 재즈적 요소를 훌륭하게 승화시켜서 독자적인 챔버록으로 완성시킨, 아르 조이의 6년에 이르는 활동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한 작품이다. 83년에는 프랑스이 신흥 레이블 Cryonic에서 6집 <Escape Inquiets>를 발표 작품으로서의 힘이 다소 떨이지고 있지만 서서히 새로운 젙개를 추구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예상하던대로 84년 그들은 새로운 분야로 진출하였다. 우선 멤버의 한 사람인 Thierry Zaboitze가 극단 Le Collectif Theatral Du Hainaut의 <Promethee>를 위한 극장용 곡을 만들고, 그것을 솔로 앨범으로 발표하였다. 이어서 롤랑 프티의 창작 발레 “Le Mariage Du Ciel Et De L’enfant”에 그룹 차원으로 음악을 담당하여 그 일부를 7집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이들 작품은 그 성격상 음악적으로 종래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음악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2년이상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작을 내걸고 부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팬은 적지 않을 것이다.
32 no image 약관
마음풍경
3681 2012-08-06
31 no image sds
마음풍경
3885 2011-12-13
30 no image JBL L-15 (48)
마음풍경
5163 2011-11-16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