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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5 (13:58:10)

그 동안 이태리 Rock 역사를 정리 요약해 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언어 전달이었다. 특집자료로 사용되어 왔었던 대부분의 자료들이 너무나도 생소한 이태리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완벽하게 번역, 소화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많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노력이 투자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Italian Rock에 커다란 관심을 가져왔었던 가까운 일본이나 그외의 여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특집기사는 지금까지 꿈꾸지 못했었다. 아무튼, 4회 연재로써 이 특집기사를 마감하면서 이태리 Rock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을 보충하고, 그 총괄적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9301.jpg Italian Progressive Rock(흔히 “Italian Rock”으로 언급되어지는)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험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영국의 Rock을 보방하면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변형되면서 이태리 인들의 기질이 담긴 Rock이 생산될 때까지 10년간의 역사에 대한 것은 Art Rock창간호에 자세히 소개된바 있으나 1950년대 후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배제되어 있어 이 지면을 통해 잠시 그 당시의 이태리 레코드시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태리에 Rock’n Roll이 상륙한 것은 1956년의 일이었다. 세계 음악시장을 강타한 젊은이들의 우상 Elvis Presley의 음반들과 함게 이태리에 처음 등장한 Rock’n Roll은 이태리시장에서는 약 2년동안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58, 45RPM Single(EP)의 등장과 Juke Box의 다량보급으로 Rock’n Roll은 뒤늦게 이태리에서 붐을 맞는다. 하지만, 미국, 영국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회, 문화적 사건들과 비교해 보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다. 그만큼, 이태리인들은 서서히 조용하게 수동적으로 새로운 젊은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태리에서는 이 기간동안 불투명한 사회, 문화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이태리의 깐소네는 방황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두가지의 형태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 하나가 문화적인 전통과 악기를 사용하는 보컬 위주의 깐소네(전통에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도 현실주의에 입각한 많은 부분을 추구했다고 마랄 수 있다)로써 대부분 무대 뒤에 대규모의 오케스트라를 동반했다. 또다른 하나는 현실주의에 부응하는 십대들 층을 겨냥한 싱어송라이터의 등장이다. 이 부류에 호응했던 젊은이들은 Rock’n Roll에 무조건 열광하는 젊은이들에 대항하는 또다른 젊은세대로써 뚜렷한 주제와 언어를 내세우는 이를 테면 지성적인 부류였다. 당시,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는 음악시장도 이 두부류의 음악층을 겨낭하게 되었고 이것은 곧 상업성과 직결되었다.

그 이전 해까지 (1957년까지) 성공을 거둔 노래들은 대부분잉 번악 곡들이었고 1958년을 기점으로 노래들이 독특한 아티스트들의 개성과 직결되는 경향을 띠기 시작햇다. 또한, 레코드 발매에 있어서도 녹음방식의 혁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1958년 당시, 이태리의 레코드사들의 녹음 Studio 15개로 늘어났고, 점점 증가되는 추세였다. 물론, Sanremo Festival의 성공이 음악시장을 크게 확장시켜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이태리 레코드 시장의 발전을 위한 주요한 해는 1958년이었다. 1958년쯤이 되어서야 결정적이고 확실한 일련의 음악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음악들은 Nilla Pizzi, Claudio Villa, Luciano Tajoli등에 의해 등장한 소위 이태리 인들의 기질이 담긴 음악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십대들이 사용하는 악기로서 노래들을 만들었다. 요컨대, 음악시장의 특이한 3가지 형태의 커다란 흐름을 정해놓았다. 첫째로 천천히 진행되긴 했지만 더 강하고 확실한 변화는 싱어송라이터들의 등장이었다. Domenico Modugno‘Nel Blu, Dipinto di Blu’라는 곡으로 산레모 가요제에서 우승을 했고 그의 음악은 소위 제노바풍의 노래로 분류되었다. 그와 함께 Paoli, Bindi, Tenco등이 음반시장에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은 그 동안 음악에 등을 돌리고 있었던 지식인들에게 흥미를 느끼게하는 그들 자체가 지식인들에게 흥미를 느끼게하는 그들 자체가 지식인들이었다. 두번째로, 절규조로 노래하는 가수들, Toni Dallara, Betty Curtis, Joe Sentieri등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뜻하지 않았던 성공이다. 이들 가수들은 미국, 영국으로부터 불어온 새로운 록을 모델로 받아들여 좀더 느린 템포로 변화시켰다. 세번째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밀라노 출신 록커들의 탄생이다. 그들의 음악들은 풍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고 이들의 첫 출현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했다. Giorgio Gaber, Enzo Jannacci, Adriano Celentano Chigo등의 밀라노의 Rocker들이 1958년에 데뷔했다.

역시, Italian Rock 역사에 있어서 1958년은 획기적인 한해였다. 음반 판매량을 보아도 이 사실이 쉽게 입증된다. 1957, 이태리 국내의 총 음반 판매량은 11,940,700이었는데 비해 1958년에는 16,875,200눈에 띄게 증가했다. 41%의 음반판매 증가율은 한마디로 경이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음반시장의 혁신에 가장 커다란 힘을 작용시킨 요인은 녹음 Studio에 대한 레코드회사의 정책 변화 때문이었다. Milano를 근거지로 하는 레코드사 Ricordi가 새로 생겨났으며 150번째의 음반발매를 기념하여 레코드 녹음실에 모인 대표자 Nanni Ricordi Franco Crepax는 다른 레코드사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던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변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제노바 출신의 많은 싱어송라이터와 그룹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밀라노 출신의 록커들 Jannacci Giaber, 그리고 Omella Vanoni등도 합류하게 된다. 1958년에는 Adriano Celentano외에도 Mina Baby Cate라는 가명을 내세워 데뷔한다.

미국은 이태리 음악시장이 커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체계적이고 치밀한 방법으로 이태리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이미 기반을 닦아 왔었다. 1953년에 RCA Roma에 이태리 지사를 열면서 아무런 잡음 없이 살며시 들어왔고, 1950년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 조심스럽게 음악시장을 지켜보고 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싱어송라이터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태리 음악계는 모방의 시대 즉 Cover Version의 시대를 맞는다. 이때가 미,영국의 음악만이 환대 받는 이piperRed.jpg 태리 음악계의 어두운 암흑기였다. 1960년대 중반, 독창성이 배제된 모방의 시대를 거쳐 Beat 시대가 도래한다. Beat계의 우연한 성공으로 이태리 음악계는 상업적으로 커다란 힘을 얻었지만, Beat역시 Cover시대의 연장일 뿐 그들의 독창성은 역시 배제되어 있었다. Beat의 시대는 너무나 짧았고, 1960년대말 Beat의 열기가 가라 앉자마자 젊은 뮤지션들의 우리들의 음악찾기라는 노래의 혁명이 일어난다. 결국 방송가와 극장가 그리고 레코드업계의 편견을 꺽어보려는 젊은 뮤지션들의 운동은 정치와 Rock문화가 융화되는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태리의 좌익계열은 이러한 젊은이들을 최대로 이용하려 했었고 이것으로부터 미국의 Woodstock Festival을 모델로 삼은 수많은 옥외 Festival의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Festival을 발판으로 수많은 이태리 Rock그룹들이 데뷔했고, 음반을 녹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최초의 이태리 Rock Festival은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Caracalla”이며 가장 유명했었던 Festival Latte E Miele가 무대 데뷔했었던 Villa Pamphilli(1972)이다.

다행스럽게도, 수많은 Festival을 통해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룹들은 1960년대의 그룹들이 지니지 못했었던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미, 영국의 Rock음악에 뿌리를 두고있으면서도 이태리 특유의 향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Italian Progressive Rock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초, Italian Rock + Italian Progressive Rock의 수식이 성립될 정도로 대부분의 Rock그룹들이 실험정신과 창조력에 불타고 있었고, 수많은 Festival이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장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Mass Media는 여전히 그들을 냉대했으며, 그들 중에 행운아들만이 레코드사로부터 음반을 발표할 수 있었다. 두차례에 거러쳐 소개되었던 Festival에 관한 기사들은 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수식처럼, Italian Rock의 역사를 Italian Progressive Rock으로 간주한다면 그 역사는 매우 짧다. 그 역사는 최초의 Concept앨범을 내놓았던 New Trolls에 의해 시작되어 Progressive Rock의 마지막 유산으로 기록되는 Locanda Della Fate의 유일한 앨범으로 끝이났다라고 말할 수 있다. , 그 역사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를 의미한다. 그 이전의 Beat시대와 그 이후의 신세대 시대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약 9년간의 이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럼, Italian Rock의 그 중요한 약 9년간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Italian Rock의 가장 중대한 시기(1069~1970)는 연대별로 크게 5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첫번째 시기는 1969년 초부터 1970년 초까지로 Beat그룹들이 Progressive Rock그룹을 변신하는 기간이었다. , 이 기간은 Italian Progressive Rock의 탄생기인 것이다. 이 당시의 선두그룹들은 후에 Super Group으로 성장되는 New Trolls, Le Orme 그리고 Quelli(P.F.M.의 전신그룹)등이 있었다.

두번째 시기는 이태리 인들의 기질과 독특한 개성을 지닌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로 1970년도 중반부터 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이들의 음악은 이전의 음악들과 비교해서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그룹들은 Il Balletto Di Bronzo, Formula 3, Trip등이었다.

세번째로 분류되는 기간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Italian Progressive Rock의 황금기로 수많은 작품들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던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이 기간동안 가장 많은 Festival Concert가 개최되었으며, 레코드 발매량과 그 질에 있어서도 최고를 기록했던 기간이었다. 지금까지 명반과 걸작으로 손꼽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 기간에 생산된 것들임을 생각할 때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 시기였던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또다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때부터 Italian Rock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F.M.이 영국과 미대륙 그리고 일본까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Le Orme Banco도 외국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항상 미, 영국의 Rock 음악만을 수입해 왔었던 이태리에서 Rock의 역수출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양과 질적으로 그들의 Rock음악이 미, 영국과 겨룰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던 반면 여전히 본국 이태리에서는 방송매체가 무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대활약했었던 그룹들은 Latte E Miele, Nuova Idea, J.E.T., Osanna, Reale Accademia Di Musica, Il Rovescio Della Medaglia, Garybaldi, Jumbo, N.T. Atomic System, metamorfosi, Quella Vecchia Locanda, Alphataurus, Circus 2000 등등이다. 이 당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각 그룹들의 주요멤버들의 개성이 크게 돌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괴상한 행동과 언동으로 청중을 매료시켰던 Osanna의 취주악기주자 Elio D’anna, 예수의 모습을 하고 등장한 Metamorfosi의 플륫주자이며 보컬리스트인 금발 Davide “Jimmy” Spitaleri, 그리스 출신으로 이태리에서 성공한 개성파 보컬리스트 Area Demetrio Stratos 등이 대표적인 개성 파들이었다. 또한, 훌륭한 Guitarist로써 Alberto Radius (Formula 3 – Il Volo) Nico Di Palo(New Trolls)를 탁월한 키보드주자로써 Joe Vescovi(Trip) Gianni Leone(Leo Nero – Il Balleto Di Bronzo)를 뛰어난 드러머로 Franz Di Cioccio(PFM) Nunzio Fava “Cucciolo”(Osage Tribe) 그리고 베이스 주자로 Bob Callero(Osage Tribe) Patrick Dijivas(PFM)를 다중악기 주자로써 Mauro Pagani(PFM)를 손꼽을 수 있다.

네번째 시기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의 시기로 수퍼그룹들이 분열되거나, 기존의 그룹들이 해산되어 탄생한 제2세대 그룹들의 활동시기이다. 1973, 극치를 이루었던 Progressive Rock의 열풍이 서서히 가라앉은 시대이다. New Trolls의 분열로 생겨난 Ibis, Formula 3의 후신 그룹으로 탄생한 Il Volo, Garbaldi의 분신으로 탄생한 Bambibanda E Melodie등이 활약했고 Biglietto Per L’Inferno, Maxophone등과 같은 실력이 뛰어난 신진 그룹들도 상당수 눈에 띤다. 특히, 밀라노 출신의 6인조 그룹 Maxophone는 이태리 Progressive Rock의 황금기인 1973년에 결성되어 BancoRocky’s Filj, Edoardo Bennato의 제작자로 알려진 Sandro colombini에 의해 발탁될 때까지 2년이라는 세월을 헛되어 보냈지만, 결국, 이태리 Rock역사에 영원히 남을 유일한 앨범을 5개월만에 완성했다. 그들의 유일한 앨범은 1975년에 발표되어 서서히 숨을 거두어 가고 있는 Italian Rock의 맥을 간신히 이어주었다.

다섯번째 시기는 1977년으로 까지 연장시켜 주었던 그룹은 바로 Locanda Delle Fate였다. 피에몬테 출신의 7인조 그룹은 원래 3인조로 출발, 3명의 멤버를 보충한후 새로운 보컬을 맞이하여 7인조라는 대규모의 그룹이 되었다. 이 그룹이 행운을 얻게 된 것은 그리스의 천재 뮤지션 Vangelis의 친형인 Niko Papathanassiou와의 만남이었다. Niko는 음반제작자로 활약하고 있었고 Locanda Delle Fate를 유망주로 발탁하여 Polydor로부터 음반제작을 의뢰, 역사에 남을 명반을 탄생시기게 된 것이다.

Locanda Delle Fate의 유일한 앨범 “Forse Le Lucciole Non Si Amano Piu(반딧불은 아마도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Italian Rock을 빛내주었던 마지막 반딧불이었다.

 

번호 제목 별명 조회 등록일
36 no image 무역 이론
웹마스터
3526 2013-02-24
말은 거창하지만 별 내용은 없습니다. 무역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할때 단순히 만들고 팔고가 아닌 어떤것을 어떻게 어디에 팔것인지에 관한것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는 일단 요즘 원정대의 주 무역품 생산지인 '초원의 띠'와 '하리하랄라야의 폐허' 이 두곳을 중심으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다른곳에서 무역을 준비하시는분들 역시 기본적인 방법은 같으니 참고하셔도 무방합니다. 먼저 무역품에 대해서 알아보 도록하겠습니다. - 초원의 띠 환약 : 모링가 열매(10개) + 특산품 인증서 - 초원의 띠 박하사탕 : 박하(100개) + 특산품 인증서 - 하리하랄라야 땅콩 잼 : 땅콩(40개) + 특산품 인증서 - 하리하랄라야 요리용 잎사귀 : 연꽃(50개) + 특산품 인증서 위의 4가지 품목에 대한 집중 분석을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무역품을 만들기 위해선 재료가 필요한데 재료를 입수하는 방법에는 1. 재배, 2. 구매 이 두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재배를 하는부분에 있어서는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특산물 재료구매 : 물가의 변동성 때문에 무역을 준비하는 바로 그시기에 구매하는것은 항상 변동하는 물가의 방향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때에 따라서는 두배가까이 가격이 차이나기도 하니까요. 경매장을 통한 물품 가격 변동폭 박하(100개) : 1.10골드 ~ 1.80골드 모링가나무열매(10개) : 1. 30골드 ~ 2.00골드 땅콩(100개) : 2.00골드 ~ 2.90골드 연꽃(100개) : 1.20골드 ~ 3.50골드 대략적인 경매장가격입니다. 원가기준을 잡을때 무역품 하나의 가격은 절대 2.00골드가 넘지 말아야 한다(이것은 저의 철칙입니다.) 그렇다면 특산품 인증서 가격(50실버)에 특산물의 가격은 절대 1.50골드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되죠. 땅콩과 연꽃은 가격대가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라 운반에 대한 부담은 있지만 특산품 제작에 1.50골드 이하로 까지 낮출수 있어서 나름 큰 메리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재료를 경매장을 통해 싼가격으로 올라올때 구매를 하고 미리 특산물을 제작한뒤 같이 무역을 할 분들을 모집하여 무역을 한다면 한결 수월할것이라 생각됩니다. *무역품 제작은 2골드 이하가 되도록 하라. 어디에 팔것인가... 이제 싼가격에 무역품을 제작하였다면 좋은가격에 팔아야겠지요? 물품을 팔곳은 5곳 정도로 정리가 되는데, 이니스테르(카오노르드), 두왕관(이즈나항구), 십자별평원(시차일드 부두), 긴모래톱(황금 혀 항구), 자유도 등입니다. 이곳외에도 있습니다만 판매가가 좋지않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 이니스테르(카어 노르드) (초원의 띠) 박하사탕 : 4g 67s(2g 33s ~ 7g ) 100% 기준에 50~150% 환약 : 4g 67s(2g 33s ~ 7g ) 100% 기준에 50~150% (하리하랄라야 폐허) 땅콩 잼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요리용 잎사귀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 두왕관(이즈나 항구) 박하사탕, 환약 : 5g 05s(2g 52s ~ 7g 57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5g 05s(2g 52s ~ 7g 57s) 100% 기준에 50~150% - 십자별 평원(시차일드 부두) 박하사탕, 환약 : 5g 80s(2g 90s ~8g 7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7g 07s(3g 53s ~ 10g 60s) 100% 기준에 50~150% - 긴모래톱(황금 혀 항구) 박하사탕, 환약 : 7g 07s(3g 53s ~ 10g 60s) 100% 기준에 50~150% 땅콩 잼, 요리용 잎사귀 : 8g 50s(4g 25s ~ 12g 75s) 100% 기준에 50~150% 이상 4곳의 가격정보입니다. 자유도는 위험한 곳이라 저도 가격 확인 못했습니다 ^^ 하지만 제일 높은 가격을 받을수는 있으나 털릴 확률 80%에 팔수 있는 확률 5%, 15%는 배를 돌려 철수. 자유도는 소규모무역은 절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한곳(카오 노르드)를 제외한 나머지 3곳은 모두 서대륙에 위치한 판매처입니다. 패치로 인해 가격변동폭이 기존 80~120%에서 현재는 50% ~ 150% 변동이 된 상태입니다. 아마도 대량으로 가지고 가서 팔면 가격 폭락이 우려되오니 원정대 무역에서는 상품군을 다양화하는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설명은 어디까지나 소규모 무역(2~4명)선을 기준으로 한것으로 무역선 한대(무역품 20개)를 판다고 할경우엔 가격변동폭이 크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리없이 마구잡이로 쓰다보니 글내용이 두서가 없긴 합니다만 물품 구입과 판매에 대한 정보만 잘 확인하신다고 해도 도움이 도지 않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캔들무역상회--
35 no image 아답터주문
웹마스터
3213 2012-10-19
34 no image Pulsar (4)
웹마스터
4208 2012-10-18
1970년대 후반 융성의 극을 달리던 프렌치 심포닉계도 1980년대로 들어설 무렵 완전히 동면상태로 들어가 버린다. 태반의 그룹들이 해산하고, 살아남은 소수의 그룹도 사운드를 변화시키고 만다. 그러한 가운데 유일하게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들의 사운드를 지켜낸 그룹이 있다. Pulsar의 역사는 오래전인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Lyon의 고등학교 밴드로 활동하고 있던 Free Sound라는 그룹에는 Phillipe Roman(b), Jacques Roman(Key), Gilbert Gandil(g, vo), Victor Bosch(ds)의 4인이 재적하고 있었다. 이 밴드는 당초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였는데 콘서트에서 공연하는 David Gilmour의 스테이지를 보고서 사운드 정책을 프로그레시브로 전환하게 된다. 1966년 그룹 결성 이해 여러 번 멤버 교체가 있었는데 1968년 전술한 4인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들은 본고장 Lyon에서 정력적으로 콘서트를 행하며 1970년 4월 Pulsar라 개명한다. 그리고 Malaval Festival, 이어서 1971년에는 그룹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Golf Druout에서의 콘테스트에 참가한다. 이콘테스트에서 성공을 거둔 그들은 프랑스 투어를 벌이면서 차츰 인기를 모아나갔다. 또 Golf Druout에서의 콘테스트를 수록한 옴니버스 앨범 <Groovy Pop Session>도 1972년 발매되어 Ange와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곡 “Pulsar”는 후의 그들의 사운드와는 다소 다르며 약가 헤비하고 혼탁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인기.실력을 한몸에 갖춘 그들은 1974년 12월 드디어 1집<Pollen>을 발매한다. 멤버는 전술한 4인에 플루트의 Roland Richard를 가입시킨 5인 편성이다. 곳곳에 Pink Floyd로부터의 영향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상력을 풍부히 가미한 섬세하고 몽환적인 부유감이 떠도는 사운드는 충분히 독창성을 감지할수 있는 아름답고 뛰어난 것이다. 팬 사이드에서도 이 앨범을 최고작으로 손꼽는 이가 적지 않다. 판매면에서도 일단 성공을 거둔 듯하다(이 앨범은 킹덤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고 영국에서도 호평을 얻었다고 한다.) 1집 발표후 그들은 약 1개월에 걸친 영국 투어를 행하여 호평를 얻고 대형 그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리고 1976년 4월, 2월 <The Strands of the Future>를 녹음한다. 이 앨범 제작시 베이스 Phillipe Roman이 탈퇴하고 게스트 형태로 참가하고 있다. Rock’n Folk지로부터 “이것은 풍부한 감성, 정렬로 충만한 대단히 뛰어난 앨범이다. Pulsar는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려온 최상의 완성도를 지닌 그룹이다. 위대한 인상파 작곡가 말러와 같은 서정성을 감지하게 한다”고 호평을 받은 이 앨범은 사운드 퀄리티에서 다소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SF적 부유감이 있는 A면의 대작, 서정적인 B면의 소품, 모두 그들의 독창성이 십분 발휘된 걸작이다. 판매면에서도 이 앨범은 대성공을 거두어 Ange, Atoll과 나란히 대형 그룹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2집 발표후 그들은 영국, 벨기에, 스위스, 포르투갈 등 장기간에 걸친 순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다. 이 인기를 눈으로 지켜본 프랑스 CBS는 좋은 조건을 내걸고 그들과 계약한다. 1977년 12월에 3집 <Halloween>이 발매된다. 베이스로 Michel Masson을 가입시킨 이 앨범은 오리지널 스토리에 기초한 토탈 컨셉트 앨범이며 플루트와 멜로트론이 효과적으로 사용된, 비교할 바 없는 서정성을 갖춘 최고의 걸작이다. 또 이 앨범에서 홍보용(적어도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레코드에는 Special Promotion이라 명기되어 있다) 싱글 “Sorrow In My Dream/Dawn Over Darkness”가 커트되었다. 이 앨범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자신넘치는 작품이었는데, 홍보 부족으로 말미암에 판매면에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3집 발표후 그들은 CBS를 떠나고 베이스로 탈퇴하여 활동이 부진하게 된다. 록계는 바야흐로 펑크, 뉴웨이브로 이행하고 있었으며그들에게는 겨울과 같은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980~81년에 걸쳐 Le Companie Du Theatre De La Satire라는 극단의 연극 세션을 맡았으며, 그 가운데 한 작품 “Bienvenue au Conseild Administraction”은 1982년 레코드화되고 있다. 컨템포러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데 Pulsar의 사운드는 건재하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들은 산발적으로 콘서트를 행하는등 활동을 계속하여 186년에는 Jacques Roman의 명의로 카세트 앨범 <Melodie Boreale>를 발매하였다. 릴랙스된 듯한 작품이지만 Pulsar 사운드의 아름다움만큼은 그대로 보존한 키보드워크는 그들의 사운드 정책이 지금도 불변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프렌치 심포닉 역사의 정도를 걸어온 그들의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33 no image Art Zoyd (44)
웹마스터
4487 2012-10-17
프랑스의 록계에 아르 조이라는 이름의 그룹이 등장한 것은 70년대 초두의 일이다. 71년 그들은 마이너 레이블 Opaline에서 싱글 “Sangria/Something in Love”를 발매하였다. 그것은 60년대 록게에서 가장 프로그레시브한 존재였던 크림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색소폰을 대담히 도입하는 등 독자적인 실험도 행한 의욕작이였다. 당시 그룹의 퍼스넬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상기 레코드에서 판단컨데 기타, 베이스, 드럼, 색소폰으로 구성된 5인조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싱글의 A면은 R.Fernandez의 작품, B면은 R.Frenandez와 J.P. Dulion의 공동작품이고 어레인지는 Alain Loewenguth로 되어있지만 그들의 그룹의 멤버였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76년 창설기의 멤버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아르 조이의 흐름을 이어받은 아르 조이 트르와(Art Zoyd 3)가 첫번째 앨범 <Symphonie Pour Le Jour Ou Bruleront Les Cites>를 발매하였다. Thierry Zaboitze(b, per, vo), Jean Pierre Soarez(Tp, per), Alain Eckert(g, per, vo), Gerard Hourbette(Vln, fl)의 4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그 독창성 및 이후의 록계에 미친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70년대 프렌치 프로그레시브 록 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과 재즈의 요소를 록의 테두리 내로 교묘히 끌어들인 연주를 전개하는 트럼팻과 바이올린, 변박자를 많이 사용한 곡제작 등은 챔버록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프랑스 남부 도시 툴루즈를 중심으로 다수의 라이브를 행하였다. 82년 영국 레코멘디드 레이블에서 발매된 싱글 “Manege”는 76년 2월 19일 팔레스 드 스포르트 듀 툴루즈에서 개막된 콘서트의 일부를 수록한 것이다. 그룹명을 다시 아르 조이로 되돌린 그들의 두번째 앨범<Musigue Pour L’Odyssee>는 유니베르 제로의 다니엘 데이스(ds), 미셀 베르그망(oboe, bassoon)을 게스트로 맞아들여 벨기에의 Overjse에서 녹음, 아템 레이블에서 발표되었다. 헨리 카우를 중심으로 하는RIO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들의 앨범은 레코멘디드 레이블을 통해 일본, 미국, 유럽 각국에 소개되어 그들의 이름을 일약 유명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80년 2월 스위스의 Kirchberg에 있는 Sunrise Studio에서 세번째 앨범 <Generation Sans Futur>를 제작한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템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도 다니엘 데니스가 가세한 작품이 1곡 수록되어 있는데 그 사운드는 전작의 아르 조이로서는 다소 클래식한 것에서 재즈적인 요소를 좀더 강조한 실험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다시, 같은 해 7월에는 자주제작 음반인 이유로 프레스 매수가 적어서 이미 입수가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린 첫번째 앨범을 재녹음하여 네번재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오리지널 음반의 멤버에 Frank Cardon(Vln), Patricia Dallio(p), Gilles Renard(sax)가 가세하여 제작된 이 작품은 음악적 완성도에 있어서 오리지널 음반을 월등히 상회하고 있다. 가장 음악적으로 충실한 시기를 맞이한 아르 조이였지만 아템 레이블이 그만 활동을 정지해 버린탓에 다섯번재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결국 영국의 레코멘디드 레이블에서 발매가 결정되어, 82년 4월~5월에 걸쳐서 녹음된 <Phase IV>는 더블앨범으로 재즈적 요소를 훌륭하게 승화시켜서 독자적인 챔버록으로 완성시킨, 아르 조이의 6년에 이르는 활동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한 작품이다. 83년에는 프랑스이 신흥 레이블 Cryonic에서 6집 <Escape Inquiets>를 발표 작품으로서의 힘이 다소 떨이지고 있지만 서서히 새로운 젙개를 추구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예상하던대로 84년 그들은 새로운 분야로 진출하였다. 우선 멤버의 한 사람인 Thierry Zaboitze가 극단 Le Collectif Theatral Du Hainaut의 <Promethee>를 위한 극장용 곡을 만들고, 그것을 솔로 앨범으로 발표하였다. 이어서 롤랑 프티의 창작 발레 “Le Mariage Du Ciel Et De L’enfant”에 그룹 차원으로 음악을 담당하여 그 일부를 7집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이들 작품은 그 성격상 음악적으로 종래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음악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2년이상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작을 내걸고 부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팬은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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