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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7 (2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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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태리 본국에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던 Italian Progressive Rock물결이 10년이 지난 후 우리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또다시 이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지면을 통하여 이 음악을 또 다시 다루게 되었다. “음악이 흐르는 밤에”라는 심야프로에서 Latte E Miele, Premiata Forneria Marconi, New Trolls등의 음악들이 최초로 전파를 통해 소개된 이래, 이제 그들의 음악은 숨겨진 음악이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의 대중음악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웬만한 레코드숍에서 그들의 앨범 등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되었고, FM방송에서도 자주 소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음악들이 국내, 처음 소개되었던 10년전의 그러나, 어느누구도 오늘날의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여기에서 다루려고 하는 Progressive Rock은 지금으로부터 20년전, 이태리에서 황금기를 맞았던 이태리인들의 기질이 물씬 풍기는 Italian Progressive Rock이다. 같은 반도국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태리인들의 음악들은 우리나라 음악애호가들의 기호에 가장 잘 맞는 음악인 것 같다. 음반팬매고로 보나, 방송 리퀘스트로 보아도 여러나라의 Progressive Rock중에서도 이태리 Progressive Rock이 단연코 으뜸이다. 1970년에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깐쏘네(Canzone)와 더불어, 비록 뒤늦게 알려졌지만 Progressive Rock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된다.
Italian Progressive Rock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MBC-FM 심약프로그램 “음악이 흐르는밤에”이었다. 지면으로 최초로 소개된 것도 이 프로그램에서 홍보용으로 , 비매품으로 배포되었던 “Underground Papyrus”이었다. 그러나 그 소책자는 이 방대한 음악들을 소개하는데 자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지면도 무척 빈약했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더욱 어려웠떤 것은, 게으름으로 인한 시간의 궁핍이었다. 아무튼, 지난번으로 종지부를 ㅉ기어야만 했었던, Underground Papyrus의 폐막은 다소 아쉬움을 남기지만 Art Rock으로의 새출발은 나름대로의 읨미를 부여해준다. 1년전, 새로이 발매된 Underground Papyrus는 Italian Progressive Rock의 특별호로 기획되어 졌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던 이유중에 가장 큰 원인은 자료의 방대함 때문에 발생했었던 편집자의 과대한 욕심때문이었다. 사실, 너무나 많은 자료 때문에 어느 것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다. 그러다가 작업이 뒤로 미루어지게 되고 결국, 독일의 Progressive Rock을 어설프게 다룬 Underground Papyrus 가발간되었던 것이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Art Rock으로 부터, 앞으로 여러회에 걸쳐서 Italian Progressive Rock이 총괄적으로 심도있게 다루어질 예정이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어느 Progressive Rock 전문잡지도 다루지 못했던 많은 분량과 자세한 내용의 Italian Rock이 앞으로 Art Rock을 통해서 심츷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물론, 외국의 음악이기 때문에 사진자료나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주로 1970년대에 발간된 수백권의 여러 이태리음악 전문지와 그동안 수집해온 수천장의 앨범자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대부분의 앨범리뷰나 요소요소에는 편집자의 주관적 견해도 앞으로의 특집속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밣혀둔다.


I. Italian Rock의 탄생
이태리 Rock 의 역사를 살펴보변 Rock의 종주국인 영.미국과는 달리 자연과 문화의 역사임을 알게 된다. Underground Papyrus의 종지부를 찍었던 Underground Papyrus 에서 다루었던 독일 Rock의 역사처럼 Italian Rock역시 본국의 대중매체와 음악산업사회로부터 소외와 냉대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영.미국의 Rock물결이 전유럽을 강타했으을 때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밀물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Rock음악을 결코 막을 수 없었으며, 더구나 젊은층에 급속도로 확산되어 가는 Rock음악을 자신들의 음악들보다도 더욱 선호하는 경향까지 보이게 된다. 이태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뚜렷한 특성도 없이 만들어져 왔던 이태리의 Light Music(경음악)에 식상한 이태리의 젊은이들은 영.미국의 색다른 음악에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레코드업계도 자연적으로 영.미국의 음악을 복제하는데에 급급했다.

1.Rock‘n’Roll의 상륙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태리 Rock의 역사는 늦게 시작되었고 또한 적지 않은 사회적 문제점도 남기면서 지체되었던 불운의 역사였다. 이태리 Rock이 지체되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Rock의 생사나개체인 레코드산업의 구조적인 결점 때문이었다. Rock‘n’Roll이 태동했던 195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말까지 이태리 레코드업체는 급속도로 변모해가는 음악시작에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수단이 부족했고,새롭게 등장했던 젊은 소비자층의 추격에 결코 앞설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장년층의 소비자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레코드업계는 짧은 시간내에 폭발적으로 급증하는 젊은 수요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떠한 준비도 갖추어 놓고 있지 않았다. Rock‘n’Roll은 1956년 Elvis Presley의 음반들과 함께 이태리에 상륙하게 된다. 당시, 이태리 틴에이져들은 Elvis 이외에 Neil Sedaka, Pat Boone, Harry Belafonte, Paul Anka, The Platters등의 음악을 뚜렷한 구분도 없이, 뒤범벅으로 즐겨 들었는데, 이러한 Pop Musician들을 구분하게 되었고, Buddy Holly,나 Little Richard 그리고 Jerry Lee Lewis와 Chuck Berry 등이 이태리 음악시장에 부재해 왓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경제적,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1950년대말에 이태리에 상륙했던 Rock‘n’Roll은 먼저 이태리의 북부와 대도시의 중앙부에 집중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제한적 현상을 보였다. 물론, 영.미국의 Rock‘n’Roll과 Rock Music은 젊은층을 겨낭한 것이었지만 당시, 레코드와 플레이어는 평균 노동자봉급에 비해서 매우 비싼편이었다. 또한 노동자층은 이러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습관을 갖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도시의 중산층의 젊은이들이 우선적으로 이러한 음악을 즐길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레코드와 플레이어의 보급이 점차적으로 늘어나면서 젊은 노동자층들도 이러한 음악들을 즐길 수 있게 된다. P.F.M의 바이올린주자로 활약했던 Mauro Pagani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사회와 어른들로부터 저항하기를 원했던 젊은이들은 Rock을 통해서 그들을 구별짓게 할수 있었죠. 옷차림새나 행동으로 말입니다. 나는 우리마음에서 청바지등을 입고 기름을 발라 이마를 착 붙인, 곱슬한 앞머리로 어슬렁 거렸던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차림은 노동자층의 것이었죠. 옷차림방식이나 이미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Rock을 추종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생활내에서 50년대 Brescia의 크리스찬 민주당정신을 공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래가사에 있어서 듣는이의 대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불고하고 영.미국의 Rock Music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강렬함과 개인적인 탐미적 경험이 풍부했으며 더구나 당시 이태리 노래들과는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이러한 음악이 흥미를 창출해 내고, 독특한 감흥을 주었던 것은 뮤지션들의 자신감 넘치는 연주와 노래 그리고 당시로서는 쇼크라할 수 있는 몸놀림과 제스츄어였다. Rock과 함께 변모해 가는 의상과 패션은 음악 그 자체보다도 더 만연했다. 이러한 현상은 대중매체와 무엇보다도 영화로 빠르게, 넓게 확산 되어 갔다.
새로운 문화를 즉각 접촉하고 가까이 했던 층은 중류층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또한 그것이 전파되는 것도 역시 젊은이들에 의해서였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한 그들은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들을 치장했고 종종, 간접적으로 심볼과 모델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추종하는 심볼과 모델들 즉, Elvis와 Beatles 등이 우상화 되었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세대들간에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태리의 젊은이들은 Rock음악의  종주국이 겪어야만 했던 기성세대와의 견해적 충돌을 체험하면서도 미.영국의 Rock을 받아드리는 과정에서 결코 저항하지도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굴복하고 만다. 그것에 그들의 오래된 전통을 맞추고, 재창조하려 했으며 때로는 Rock에 관계된 이야기와 의미를 개조하기도 했다.

2.Beat Rock의 출현
완전히 분류된 장르로서 Italian Rock은 1970년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음악스타일로서는, 1950년대말부터 가끔씩 등장하고 있었다. 때로는, 몇몇 이태리 가수들이 그들의 데뷰곡으로 Rock이나 그와 유사한 작품을 들고 등장하기도 했으나 곧 그들의 경력을 포기해야할 만큼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다. 당시, 이태리의 Rock이라고 불리웠던 작품들은 대개 보사노바나 월츠와 같이 경음악으로 분류해야될 작품들이었다. 그만큼 이태리에는 오랫동안 Rock Musician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 Rock을 연주하던 Session Man들은 있었으나 그들의 주업은 무대위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위해 댄스뮤직을 연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우로 파가니는 당시 음악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오래도록 기다렸던 이태리 Rock의 출현은 이것을 믿지않았던 레코드 업자들의 노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대중들의 요구와 입력에 의한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레코드업자들의 믿음의 부족은 1960년대에 등장하게 되는 “Beat”시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성공하고 있었던 “Corver Version(이태리 그룹들에 의해 재녹음된 영.미국의 Rock)”으로 말미암아, 레코드업자들은 이태리 뮤지션들이 창작한 작품들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뮤지션들과 레코드사와의 관계는 업자가 “우리는 당신들이 해볼만한 좋은 작품들을 갖고 있지!”라고 말할때나 성립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아니면 “외국에서 이미 좋은 판매고를 거두었던 작품을 당신들이 해봐야겠어! 라고 할때만이, 레코딩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만약 그룹으로서 “우리가 이것들을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결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레코드업자들의 편견과 강요로 많은 이태리뮤지션들은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창작력보다는 모방하는 능력이 더욱 인정을 받았던 시대였다. 이태리 뮤지션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대중매체와 대중들이었을 것이다. 대중들은 알아듣기 힘든 영.미국의 음악만을 선호했고 대중매체는 대중들이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영.미국의 문화만을 소개하는데 급급했다. 따라서, 음악시장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미국의 Rock에 대항하여 아주 적은 점유물이라도 얻기위해서 안간힘을 썼던 이태리의 뮤지션들은 모방상품이라도 들고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태리 뮤지션들은 영.미국의 Rock을 모방하면서도 이태리인의 기질을 잘 살려 성공했던 사례는 Renato Carosone가 대표적이다. 그의 곡 ‘Tu Vuo’ffa’ll Americano’(미국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그대)에서 가사와 음악사이의 괴리가 어덯게 풍자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곡은 Rock을 흉내내는 사투리로 된 가사를 통해서 성공을 거두었고 또한, 노래속에서 ‘Okay’라는 단어를 자주 등장시키고 뚜렷한 나폴리풍의 멜로디를 섞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Beat시대에 도래하기 전까지 이태리의 Rock에 가까운 음악들은 영어권의 운율에 맞추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것은 ‘이태리 언어의 특성을 영어권 음악의 테두리안에서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느냐? 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였다. 이 원초적인 무누제가 Beat그룹들에 의해 해결될때까지 이러한 이태리 음악들은 불완전한 운율과 오래된 Canzone의 모든 빈약성을 계승해 오고 있었다. 이러한 불완전성과 빈약성을 무너트린 최초의 Beat그룹들이 바로 I nomadi, I Corvi, I Rokes, 그리고 Equipe 84 등이었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이태리 Beat그룹의 음악적 원류는 크게 두개의 맥류로 나누어져 있다. 1964~1965년에 결성되었던 많은 그룹들, 그들은 주로 Beatles와 Rolling Stones등을 찬미하고, 추종하고, 그리고 흉내내는 그룹들이었다. 그들은 음악뿐만 아니라 그들처럼 헤어스타일과  패션을 맞추고 무대에 등장했다. 또하나의 맥류는 소수의 그룹들로, 작은극장의 밤무대에서 소규모의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었던 그룹들이다. 이들은 다시 두개의 유형으로 나뉘어지는데 리듬솔로기타, 베이스, 드럼, 그리고 종종 솔로보컬을 대동하는 기본편성의 그룹과 여기에 색소폰, 피아노, 그리고 가끔 트롬바와 오르간을 첨가시키는 다중편성의 그룹으로 나뉘어 진다. 사실, 두번째의 맥류에 속한 그룹들은 실력과 재능을 고루 견비한 인재들이었으나 첫번째 맥류그룹들에 의하여 항상 짓밟히고 그늘에 가려져 왔던 그룹들이 대부분이었다.
최초로, Beat그룹들이 성공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이태리에서 Beat그룹이 많아지고 붐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던 것은 수입악기점의 악기 판매고가 부쩍 늘어나고 담배가게의 담배판매고가 역시 늘어나는 특이한 현상이었다. 유명한 외국상표를 달고 있는 Beat악기들의 판매고가 급증하는 것은 Beat연주자들의 수가 그만큼 급증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음반업자들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음악적 가치관을 무시하기까지 했다. Beat그룹의 제 1세대로서 재능있고 현명하며 그리고 조직적으로 이태리의 음악시장에 도전했었떤 그룹들로서는 I Rokes, Delfini, New Dada, Equipe 84, I Nomadi 그리고 Ribelli등이 있었다. 후에, 이들의 음반판매고가 영.미국 그룹들의 레코드판매고에 육박하는 수십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게 될줄이야 음반업자나 그룹들 자신조차 전혀 예상치 못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이 그저 “우연”이었을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모순이 있었다. 한 그룹도 아니고 어떻게 많은 그룹들이 이러한 똑 같은 우연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들중 I Rokes는 이태리태생의 그룹은 아니었으나, 이태리에서 활동해 성공한 특이한 경우의 외국인 그룹이다. 이들은 4인조 그룹으로서 리더인 Teddy Reno로부터 그들의 고향인 런던에서 결성되어 Beatles처럼 독일 함브르크로 가서 무명생활을 마치고, 곧 이태리로 건너와서 데뷰작 “Un ‘A’nima Pura”를 발표한후 Beat그룹으로 변신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시끄러운 음악들로 분리, 구분되었던 그들의 음악들은 발표되자마자 의외로 잇따른 성공을 거두었다. Beat의 붐을 일으켰던 I Rokes의 첫번째 Beat곡은 “‘C’e Una Strana Espressione Nei Tuoi Occhi”로서 50만장이라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싱글 판매고를 올렸다. 그 당시, I Rokes와 쌍벽을 이루었던 라이벌 그룹으로서 Equipe 84가 존재했다. 이태리 Modena출신의 Maurizio Vandelli, Franco Ceccarelli, Victor Sogliani와 Alfio Cantarella 이렇게 네명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Rolling Stones, Moody Blues 그리고 Hollies 등 영국 그룹들의 음악들을 이태리 감각에 맞게 변형시켜 크게 성공했다. Equipe 84는 후에 Progressive Rock그룹으로 변신,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I Rokes와 Equipe 84의 대성공은 Italian Rock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물론 그들의 음악이 영.미국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Italina Rock의 정초석이 되는 Beat의 출현을 예고했었기 때문이다.
조금의 공백기도 없이, I Rokes와 Equipe 84의 뒤를 이어, 북이태리의 도시 Padova로부터 오르간주자를 앞세우는 4인조 그룹 I Delfini가 Beat음악을 내걸고 등장했다. 이들의 사운드는 보다 진보된, 전형적인 Beat음악으로서 밝고 쾌활한 ‘Stasera Sono Solo’와 ‘Qulla Dei Sogni Miei’라는 곡들을 성공시켰다. 이와 더불어 Equipe 84의 출신지인 Modena로부터 I Nomadi라는 수퍼그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음악성은 이태리 Progressive Rock계에서 최고로 손꼽힐 만큼 매우 특이한 선율구성을 지니고 있는데, 당시 Bob Dylan과 Sony & Cher 그리고 Barry McGuire와 Peter Paul & Mary의 Folk 영향권에 다소 영향을 받은 그들의 작품 ‘Come Potete Giudicar’은 초기 Italian Beat계의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후에 많은 Progressive Rock그룹을 배출시키게 되는 밀라노로부터는 Rick Maiocchi가 이끄는 그룹 I Camaleonti가 돌연 등장, Small Faces의 곡을 이태리적으로 변형시킨 ‘Sha La La La’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주로 외국곡들을 이태리어로 번안하여 주목을 받았는데, 리더인 Rick Maiocchi는 곧 솔로로 전향, Linea Verde’의 곡 ‘Uno In Piu’를 싱글로 발표, 커다란 성공을 맛보았다.
역시, 밀라노 출신들인 I New Dada와 I Dik Dik은 데뷰당시부터 많은 젊은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그룹들로서 오늘날에도 그들의 음악은 인기를 잃지 않고 있다. I New Dada는 밀라노 중산층의 청년들로 결성된 그룹으로서 그들은 행운아들이었다. Rieti 지역전체의 Festival에서 입상했으며, 로마의 유명한 Piper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또한, 그들은 “Chissa Chi Lo Sa ?”, “Studio Uno”, “Andiamoci Piano”, “Musica Da Film”, “Aria Condizionata”등등 많은 TV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1965년 Beatles의 이태리 순회공연과 1967년 Rolling Stones의 순회공연시 오프닝그룹으로 참가했던 억세게 운이 좋은 청년들이었다. I New Dada는 사실상 커다란 음악적 재능을 지닌 그룹은 아니었다. 그들은 ‘Na Mia Voce’, ‘L’amore Vero’그리고  Rhythm & Blues의 고전인 ‘T Bird’와 ‘I Go Crazy’등을 이태리곡으로 만들어 내었고, 결성 멤버였던 Maurizio Arceri는 후에 솔로로 독립해서 감성적인 노래들을 부르는 가수로 전향했다. I New Dada, 남다른 음악적 경험과 창작력도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이태리의 Beat그룹으로서 많은 인기를 끌어 모았던 대표적 인 그룹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I Dik Dik도 역시 활동적인 그룹이었지만, I New Dada와 마찬가지로 음악적으로는 능력이 없었던 그룹이었다. 그들은 항상, 다른 뮤지션들이 이미 만든 곡들을 가지고 활동했다. 특히, 국외 히트곡들을 이태리어로 번안하여 부르곤 했다. 그러나 레파토리 선정에 있어서의 그들의 치밀함과 남다른 노력은 그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고 훌륭한 가창력을 지닌 Lallo Sbrizziolo라는 보컬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최대 강점이었다. 그들의 음악적 취약점을 보강해줄 수 있었던 인물들은 바로 이태리의 대표적인 장시가 Mogol과 천재 음악가 Lucio Battisti였다. Mogol은 I Dik Dik을 위해 가사들은 만들어 주었을뿐만 아니라 그들의 초기 제작자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1966년, Mamas & Papas의 히트곡 ‘California Dreaming’을 번안한 ‘Sognando la California’로부터 Len Barry가 불러 히트시킨 ‘1-2-3’에 이르기까지 리바이벌한 곡들로서 대공성을 거두었다. 그들에 있어서 또하나의 행운이 잇었다면, 그것은 1060년대말 “음악에 정통한”위대한 대중음악 작곡가 Lucio Battisti와의 만남이었다. Lucio Battisti는 Mogol과 함께 I Dik Dik의 작곡가, 제작자로서는 합류했다.
Verona 출신의 선두 Beat그룹 I Kings가 등장했을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당시 인기절정의 미국 그룹 The Kinks와 혼동했고, 그 덕에 그들은 유명해질 수 있었다. 또한 같은지역 출신인 Dino도 Bob Dylan의 곡들을 리바이벌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Parma 출신의 I Corvi는 결성초에 ‘Datemi una Lacrima per piancere’, ‘Lece’, ‘Raggazo di Strada’등의 곡을 가지고 대중적인 성공ㅇ르 거두었지만 곧, Beat그룹으로 진로를 바꾸면서 Fausto leali와 I Ribelli, 두개의 형태로 분열되었다. Franco Leali는 1059년부터 Brescia 지역에서 프로 뮤지션으로 활약했는데,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던 Beatles의 곡들을 연구, 분석하고 자신의 곡으로 만든 다음 대중들에게 들려주곤 했었다. 그는 이태리에 Beatles의 곡들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었다. 그는 Beatles의 곡으로서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Beatles의 외모를 흉내내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음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Beatles의 음악을 분별력 있게 수용했던 뮤지션이었다. 1963년, Fausto Leali는 그룹 I Novelty와 함께 오랫동안 Beatles의 레코드를 듣다가 Beatles의 ‘Please Please Me’를 이태리어 곡으로 번안해서 레코드 데뷰를 하게된다. 그는 ‘La Campagna in Citta’식으로 이태리어로 된 제목을 내걸고 Beatles의 작품들을 번안하거나 변형시켜 잇다라 음악시장에 내놓았다.
실질적으로 Fausto Leali는 Beat계열에 속하는 뮤지션은 아니었지만, 항상 뒤에 그룹들을 대동했던 보컬리스트, 연주자로서 그리고 훌륭한 재능을 지녔던 뮤지션으로 당시 이태리 음악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었다. 드러머 Gianni Dall’Aglio가 이끌었던 그룹 I Ribelli의 역사는 Celentano의 Back그룹으로서 14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라는 보잘것없는 역사를 갖고 있으나 두명의 Guitarist들, Giorgio Gaberi와 Gino Santercole와 함께 독자적으로 ‘Chi Sara la ragazza del Clan’이라는 싱글을 발표 30만장의 판매기록을 올리기도 했다.
1966년은 이태리에서 Beat음악이 커다란 붐을 이루었던 뜻깊은 한해였다. Beat음악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강하게 이태리 음악계를 강타했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기존 Beat그룹과 더불어 많은 신생 Beat그룹들이 등장, 무수히 많은 곡들을 만들어 내었다. Beat의 효시그룹인 Equipe 84는 ‘Resta’와 ‘Io ho in mente’를, I Rokes는 ‘Ascolta nel Vento’와 ‘Che Colpa Abbiamo noi’를 발표했고, I Corvi는 ‘Sono un Ragazzo di Strada’를, I Dik Dik은 ‘Sognado la California’를, I New Dada는 ‘Non Dirne Piu’를 I Nomadi는 ‘Noi non Ci Saremo’를 I Camaleonti는 ‘Io lavoro’를 I Ribelli는 ‘Alla Buena de dios’를, 그리고 I Giganti는 ‘Tema’를 각각 발표했다. 당시, 이태리 대중음악계의 우상으로 군림했었던 Rita Pavone, Gianni Morandi와 Mariolino Barberis 등의 그늘 속에서도 이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음악층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Beat음악의 붐은 빨리 달아올랐던 만큼, 1년만에 갑작스럽게 사그라들고 만다. 1967년 서로 라이벌로서 Beat계를 이끌었던 Equipe 84와 I Rokes가 갑작스럽게 활동을 정지했고, 해산위기에 봉착했다. 그동안 그들의 앨범 판매고는 엄청났고, 인기또한 하늘로 치솟고 있는 상황속에서 그들의 해산위기는 Beat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Equipe 84는 Mogol의 작사와 Lucio Battisti의 작곡으로된 ’29 Settembre’라는 곡을 끝으로 그들의 거대한 Beat시대를 마감시켰다. I Rokes는 어렵게 해산위기를 넘겼으나 당시 서서히 불러오는 히피문화(Flower Culture)를 유입시켰다. I Giganti는 ‘Proposta’라는 곡으로 대중가요제 Sanremo에 참가했고, I Nomadi는 Beat계에서 탈피, Cuccini와 함께 본래의 Modern Folk으로 귀환했다. 그러난 그들의 마지막 Beat계열의 곡 ‘Dio e Morto’는 의외로 높은 반응를 얻었다. I Ribelli는 Celentano와의 활동을 중지하고 새로운 가수 Demetrio와 함께 ‘La Follia’와 같은 Easy Beat류의 음악과 ‘Pugni Chiusi’와 같은 새로운 멜로디를 그들의 음악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I Dik Dik은 Procol Harum의 ‘A Whiter Shahe  of Pale’를 이태리어로 번안 ‘Senza Luce’를, I Camaleonti는 ‘Hamburg’를 번안한 ‘L’ora della’more’를 발표했다. 1967sus, 1년간 잠시 빛을 발했던 Beat Music의 시대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을 때, 이태리 Beat계가 음악계에 기여한 업적에 대한 평가는 창조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내세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남겼음에 틀림없다. 이태리 대중음악사의 논리적인 관점에서, Beat시대는 복제 시대를 의미했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외부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빌어온 시대였으며, 긍정적으로 볼 때 확실히 성공했던 하나의 음악 조류엿으며 또한, 연주력을 위주로 음악성을 논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연주위주 형태의 음악은 사실 이태리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역사와 선조의 깊은 음악적 뿌리를 갖고 있는 이태리인들의 기질이, 바로 연주를 강조하는 Beat시대부터 점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가장 커다란 업적은 1970년대초에 화려하게 타오르게 되는 Italian Progressive Rock을 잉태했다는 점에 있다. 즉, Beat계는 앞으로 우리가 이 지면을 통해서 심층적으로 다루게 될 Italian Progressive Rock의 믿거름과 정초석이었다. Beat계의 출현과 퇴장으로 인하여 New Trolls, Formula 3, Le Orme, Banco Del Mutuo Soccorso, Il Belletto Di Bronzo, Latte E Miele등 Italy Beat의 제 2세대, Progressive Rock그룹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Art Rock Magazine 제 1호에서 발췌
2007.05.20 (14:14:00)
이동천
정말 많은 수고를하시네요.그저 너무감사할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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