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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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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5368
2006.10.07 (19:53:30)
원본출처:   
1 캔터베리 뮤직의 탄생배경
 
  캔터베리 뮤직은 영국 남동부 켄트 주 도시 캔터베리를 근거지로 하던 뮤지션들과 이로부터 파생된 그룹들의 음악을 총칭하는 것이다. 1960년대초, 시인, 모델, 가수로 활동하던 레이디 쥰(Lady June)이 기거하던 캔터베리의 아파트는 젊고 실험적인 음악 지망생들의 아지트였으며 이들의 음악에 매료된 그녀는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중 케빈 에어즈, 데이빗 알렌 그리고 로버트와이엇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와일드 플라워즈와 소프트 머쉰은 캔터베리 뮤직의 뿌리가 되었다.
당시 영국, 특히 런던의 전후 세대 젊은이들은 이국의 문화와 예술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이들에 대한 다양한 접목을 시도했다. 록큰롤, 째즈, 사이키델릭, 환상문학, 현대음악, 사진예술, 팝아트, 다다가 이들의 감성을 지배했으며 이에 기초한 새로운 감각파 작가는 ‘비트닉’이라는 이디엄으로 대표되었다. 비트닉 작가인 윌리엄 버로우즈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존재로, ‘소프트머쉰’은 버로우즈가 1961년 발표한 소설 제목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소설은 호모 섹슈얼한 표현과 폭력 그리고 약물 경험에 기초한 영상적 언어로 가득차 있었다. 데이빗 알렌이 그의 연극 무대의 배경 음악을 맡았고, 이때 알게 된 현대음악가 테리 라일리로부터 테이프 뮤직 창작 기법을 배운 것은 당시 젊은 예술가들의 성격 그리고 그들 사이의 초장르적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분위기는 캔터베리 뮤직 뿐 아니라 이후 연극적 요소와 록 음악의 결합인 씨어트리컬 록을 제시한 제네시스, 환상문학과 현대음악의 요소를 록에 도입한 킹 크림즌, 영상적 심포닉 록의 예스 등 대표적인 아트록 그룹들의 탄생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와일드 플라워즈는 레이디 쥰의 아파트와 로버트 와이엇의 집을 자주 들락거리던 케빈 에어즈, 브라이언 호퍼, 휴 호퍼, 데이빗 알렌 그리고 로버트 와이엇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후 어린 기타리스트였던 리차드 싱클레어가 이에 가세했다. 이제는 눈치를 채셨겠지만, 캔터베리 뮤직을 삼등분 했던 그룹들이었던 소프트 머쉰, 캐러반, 공의 리더들은 모두 와일드 플라워즈 출신이었던 것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들의 음악적 기반에는 현대예술과 째즈가 자리잡고 있었다. 소프트 머쉰의 키보드 주자였던 마이크 레트리지는 학창시절 브라이언 호퍼와 함께 현대음악가 힌데미트의 오르간 소나타를 피아노와 클라리넷으로 편곡해 연주할 정도였다. 어쩌면 와일드 플라워즈나 초기 소프트머쉰의 음악은 대단히 난해한 전위음악으로 출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캔터베리 뮤직의 그 독특한 음색이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캔터베리 뮤직의 매력이자 가장 큰 특징은 실험성을 추구하면서 그 저변에는 언제나 퍼퓰러 뮤직의 감성과 방법론이 자리잡고 이다는 것이다. 캔터베리 그룹들 사이의 음악적 차이는 이러한 양측면 중 어느쪽을 중시하려했는가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헨리 카우가 전자라면, 캐러반은 후자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이 두 그룹은 여전히 정신적 연대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와일드 플라워즈의 멤버들은 원래 파퓰러 뮤직에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심지어는 거부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려는 것이 대중적 인기와 성공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고, 당시만 하더라도 파퓰러 뮤직은 그들의 개념에서 본다면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로버트 와이엇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자신의 음악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런던에 있을 때 나는 지독히 전위적인 째즈를 지지했어요. 그건 대중적인 것은 곧 좋지 않은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이들의 음악은 파퓰러 뮤직이 예술적인 면모와 가능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 그룹은 바로 비틀스였다. 로버트 와이엇은 비틀즈의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인 음악에 매료되었고 대중성과 대중성을 예술성은 분리되지 않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캔터베리 뮤직은 현대음악, 째즈 그리고 파퓰러 뮤직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2 캔터베리 뮤직과 째즈
록 음악에 익숙하신 분들이 캔터베리 뮤직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당혹스러워 하는 것 중 하나는 그것이 담고 있는 째즈적 요소이다. 특히 외지에서 얻은 정보나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처음 접하게 된 캔터베리 뮤직 작품들이 소프트머쉰의 <Third>였다면 반 이상의 분들은 분명 캔터베리 뮤직에 더 이상 흥미를 갖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Third>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며 캔터베리 뮤직을 섭렵하면서 반드시 들어 볼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60년대 이후 째즈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모를까, 정통 록 음악의 비트나 기타 프레이즈를 즐겨 들어온 귀에는 거부감이 들만한 작품임에 틀림 없다. 필자 역시 한 귀에 쏙 들어오는 음악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캔터베리 뮤직을 권할 때 절대 소프트 머쉰의 중기 작품을 꼽지 않는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타인을 특정 음악 세계로 유혹할 때 그를 과도하게 배려하는 것 역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나, 경험상 역시 부적절한 것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한가지 미리 집고 넘어가야 될 점은 캔터베리 뮤직의 전부가 째즈에 경도 되어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 탄생 배경과 음악적 영향 그리고 작가들이 마음속에 깊게 뿌리 박고 있는 째즈적 전통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다. 심지어 많은 평론가들이 캔터베리 뮤직은 곧 브리티쉬재즈록이라는 성급한 등식화를 시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캔터베리 뮤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재즈와의 관계를 살펴보지 않ㅇ르 수 없다.
캔터베리 뮤직이 영향 받은 재즈의 분파는 크게 세 가지, 즉 프리재즈와 퓨전 째즈 그리고 째즈 록이다. 이는 60년대 중반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캔터베리 뮤직이 당시 현재 진행형의 째즈로부터 꾸준이 자양분을 받으면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캔터베리 뮤지션들이 째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영국의 문화적 상황을 뒤짚어 봐야 한다. 이들이 성장하던 시기인 60년대 초는 미국의 째즈가 유럽에 상륙해서 커다란 인기를 누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비밥과 모던 째즈를 그들에게 들려 주었을 것이고 결국 이들은 자연스럽게 째즈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 로버트 와이엇의 집에 하숙하면서 그에게 드럼을 가르쳤으며, 데이빗 알렌을 소개시켜 준 장본인이기도 한 미국인 드러머 조지 니도르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로버트의 아버지는 특히 음악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는 모두 앉아서 음악을 듣곤 했는데 그것은 쇤베르크, 베베른, 슈톡하우젠에서 에릭 돌피, 오넷 콜멘 그리고 존 콜트레인에까지 이르렀지요.”
현대음악과 째즈의 세례를 동시에 받은 이들에게 있어 프리 째즈는 하나의 자연스런 음악 어법 정도였을 것이다. 캔터베리 뮤직에 본격적으로 째즈적인 프레이즈가 도입된 것은 소프트 머쉰의 <Third>였다. 한 면을 모두 채우는 네 곡으로 구성된 더블 앨범이었던 본 작은 이전에 발표된 <Volume 1>, <Volume 2>와는 완전히 다른 음악성을 보여 주고 있다. 보컬이 들어간 것은 <The Moon In June>정도였으며, 사이키델릭적인 부유감은 거의 제거되었다. 대신 이들은 아프로 아메리칸의 째즈를 수용하되 기존 유럽 현대예술의 전통과 사상에 이를 용해하여 유럽형 째즈를 탄생시키려 했다. 리듬 앤 블루스의 흔적이나 스윙감이 제거된 무조성과 미분박으로 점철된 프리 째즈는 당시 현대 음악의 사조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 많았다. 째즈의 도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건반 주자 마이크 레트리지는 재즈를 접하고 난 후, 자신의 관심이 존 케이지나 칼하인츠 슈톡하우젠과 같은 전위 작곡가들에게서 찰스 밍거스, 씰로니어스 몽크,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으로 바뀌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이들은 프리째즈적 요소를 흡수하면서도 록의 이디엄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프리째즈보다는 째즈록으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는 마하비슈느 오케스트라나 웨더 리포트의 째즈 록 퓨전과는 달랐다. 정합성이나 정격과는 거리가 먼 곡 구조와 진행 방식 그리고 장시간의 즉흥 연주는 역시 프리 째즈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Forth>와 <Fifth>에서도 계속되었으며, 특히 오넷 콜맨 이후의 프리 째즈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엘튼 딘이 색스폰 연주가 곡 전체를 리드한 <Fifth>에서 그 절정을 이뤘다. 하지만 취주 악기와 키보드 주자인 칼 젠키스(Karl Jenkins)와 드러머 존 마샬(John Marshal)이 참여하게 되면서 소프트 머쉰의 음악은 공격적인 프리 째즈적 프레이즈로 이어진 째즈록에서 퓨전 째즈 스타일로 서서히 변모되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칼 젠킨슨이 마이크 레트리지를 대신해 건반 악기를 전담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중후반기 소프트머쉰의 음악을 선호하는 팬들께 대단히ㅣ높은  평가를 받은 라이브 앨범 [Alive & Well]는 프리째즈적 요소를 전혀 찾아 볼수 없을 정도로 퓨젼째즈에 가까운, 테크니컬한 째즈 록 작품이었다. 결성 당시 멤버들의 이름을 크레딧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프리째즈와 퓨전째즈는 소프트 머쉰 뿐 아니라 많은 캔터베리 그룹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리 째즈는 헨리 카우(Henry Cow) 계열의 그룹들, 퓨젼 째즈는 내셔널 헬스(National Health), 갈가메쉬(Gilgamesh), 콰이엇 선(Quiet Sun), 뉴클리어스(Nucleas) 그리고 Pierre Morlen 재적 당시 중기 공(Gong)의 음악에서 그 영향력이 드러냈다.
캔터베리 뮤직을 포함한 브리티쉬 째즈록 씬은 미국의 그것과는 달리 대단히 이성적인 자세로 째즈를 대하려는 경향이 짙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째즈의 본질을 무시한 접근 방법이기도 했다. 이에 따른 대표적 실패 사례는 키스 티팻(Keith Tippett)이 주도했던 프로젝트 그룹 센티피드(Centipede)의 작품일 것이다. 소프트 머쉰의 멤버였기도 한 로버트 와이엇, 엘튼 딘, 닉에반슨, 칼 젠킨스를 비롯해 로버트 프림, 피트 신필드, 마이크 파토 같은 브리티쉬 록의 주요 뮤지션이 참여하고 있는 [Septober Energy]는 째즈의 그루브나 스윙감은 물론 그것의 근원인 육체적인 요소까지도 완전히 거세해 버린 작품이었다. 키스 티팻은 본 작을 통해 째즈 음악을 서양 고전으악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하려 했다. 하지만 본 작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긴 커녕 지루하기 짝이 없는 별 볼일 없는 작품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이런 이성적 접근 방식이 새로운 음악으로 승화된 것은 캔터베리 뮤직에서 였다. 그들은 째즈의 연주 방법론을 수용하되 그 속에 담긴 리듬 앤 블루스적 요소는 철저히 제거하려 했다. 그 대신 그들은 록을 그 자리에 넣음으로써 육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째즈의 기교와 자유 그리고 현대음악의 실험 정신이 록 비트 속에서 어우러진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비록 그 출발점은 달랐을지언정 어떤 의미에서 마일스 데이비스가 [In A Silent Way]나 [Bitches Brew]에서 하려 했던 것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캔터베리 뮤지션들은 록 음악사에서 그 누구도 이루어 내지 못했던 음악적 성과를 얻어낸 셈이다.

3 캔터베리 뮤직과 사이키델리아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등 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사이키델릭 뮤직이 플라워 무브먼트와 반전 사상에 기초하고 있었음에 비해 영국의 사이키델릭 뮤직은 다다나 초현실주의, 미래파 등 미술계에서 영감 받은 영상적 이미지를 음향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정치적인 메시지나 히피 문화의 전달보다는 소리의 표현가능성 확장 측면이 더 강조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대표적 예는 와일드 플라워즈 초기 멤버였으나 마약 때문에 영국 입국이 거부된 후 프랑스에서 자신의 그룹을 결성한 데이빗 알렌의 공(Gong)이었다.
길리 스미스의 스페이스 위스퍼와 스티브 힐리지의 애시드 기타 사운드 그리고 팀 브레이크의 신세사이져 음으로 뒤덮힌 공의 음악은 그 어떤 그룹의 음악보다도 비현실적인환각 환청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냈다. 공은 형식적인 것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 이전 그 어떤 그룹들도 시도하지 못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창출하려 했으며, 그 출발점이 극단적인 무정부주의라는 점에서 어떤 그룹들보다도 급진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플라워 무브먼트가 끝난 70년대에도 이러한 음악 방식과 생활 태도를 고집했다. 아마도 데이빗 알렌은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중들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가 이를 위해 선택한 환각적 음 세계였으며 이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기존 사이키델릭과는 차별되는 것이었다.
그 음악 세계속에 그는 자신의 독자적 신비 철학인 ‘플레닛 공(Planet Gong)’ 사상을 담아 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공의 ‘73년 작인 [Angel’s Egg]초판에 첨부된 부크렛에 상세히 담겨 있는데, 현실적인 인간에게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개인적 상상의 소산물이었다. 필자의 이해가 일천해서 그렇지 몰라도 어쩌면 그들은 탈현실이나 비현실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때문에 필자의 견해로는 그들의 성과는 음악적인 것이었지 내용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이는 프랑스의 마그마도 마찬가지다)
공과 함께 캔터베리 뮤직에서의 사이키델릭 전통을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낸그룹은 아마도 아르자켈(Arzachel)일 것이다. 이후 공의 기타리스트로 활약하게 되는 스티브 힐리지와 데이브 스튜어트가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아르자켈의 유일한 앨범은 자극적인 오르간 음향과 기타 굉음의 충돌을 통해 분출되는 어둡고 깊은 사이키델릭 음공간은 순수 음악적인 면에 더욱 비중을 둔 결과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기존 록 음악의 속도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딜레이되거나 우회하는 곡 전개 방식을 통해 이전의 스트레이트하고 단선적인 록 음악에서는 도출될 수 없었던 다차원적인 영상감을 제공한다. 그리고 소프트 머쉰의 초기 작품은 [Volume 1]과 [Volume 2]에서도 사이키델릭적인 사운드 운용이 뚜렷이 드러난다.
사실 70년대 이후 캔터베리 뮤직 작품 중에서 사이키델릭적인 방법론이 전면에 나타나는 것을 찾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 그리고 가장 노골적인 사이키델리아를 보여 준 공의 경우도 캔터베리 주류 그룹들과는 음악적으로나 인적으로도 교류가 활발치 않던 비교적 패쇄적인 집단이었다. 하지만 초기 그룹들이 구축했던 사이키델리아의 흔적은 이후 캔터베리 뮤직이 째즈나 현대음악으로 경도되었을 때의 작품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이키델릭 뮤직이 지녔던 비육체적, 비현실적 음공간에 대해 이들 상당수가 공감대를 형성하였으며 이를 음악의 원천으로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서양의 소위 순수음악이 지녔던 이성적 전통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4 캔터베리 뮤직과 아방가르드
캔터베리 뮤직 집단 중에서 가장 난해한 음악을 선보였던 것은 역시 헨라카우 패밀리였다. 요컨대 그들이 모토로 삼은 것은 – 브레히트로부터 영향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 리얼리즘과 방법적 실험주의였다. 데뷔 앨범인 [Leg End]는 째즈에서 물려 받은 연주 기교와 정교한 작곡의 산물이었다. 각 프레이즈의 유기적 연관성을 무시한 비선율적인 진행은 그들이 일반 대중음악 작법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음을 눈치채게 한다. 리더였던 크리스 커틀러는 ‘새로운 메시지는 새로운 형식에 실려 전달되어야 한다.’ 는 신념을 한 순간도 버리지 않았다. 아마 70년대 활동을 시작한 록 뮤지션중에서 지금까지도 이처럼 일관된 자세와 방법론을 고집하는 이는 그다지 흔치 않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헨리 카우의 초기 작품은 프리 째즈와 현대 음악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임프로비제이션처럼 들리지만 실은 작곡된’ 음악이었다. 그들의 음악을 방법적 실험주의라 일컬은 이유는 그것이 실험을 위한 실험이나 형식적 탐구 그 자체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의식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의지에 기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 그들은 상업주의 대중 음악을 반테제로 지적했으며 심지어는 영미의 록 역사 자체마저도 부정하려는 성향을 나타냇다.
헨리카우의 멤버들이 스스로 작성한 프로파일에는 음악적으로 영향을 주었거나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뮤지션을 적은 난이 있었는데, 그 리스트에는 록뮤지션 대신 찰스 밍기스,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찰리 파커 등 째즈 음악에 있어 가장 혁신적이었던 뮤지션들 그리고 에드가 바레즈, 쿠르트 바일, 야나첵, 존 케이지와 같은 급진적이면서도 반체제적인 현대 음악가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록큰롤에서부터 하드록으로 이어지는 주류 록 음악의 형태에 대해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진 몰라도 초기 그들의 작품에는 육체적이거나 감성적인 측면이 다른 록 음악에 비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프리 째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곤 하지만 그것은 째즈의 맥락에서라기 보다는 현대 음악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수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 그자체에 있어서 그들이 다분히 모더니스트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이 형식주의나 서구 이성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치 성향 때문이었다. 헨리카우의 멤버들 특히 크리스 커틀러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로 일관했으며 동시에 이것들을 가능케 한 서구 문명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질문코자 했다. 이러한 태도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In Praise Of Learning]그리고 아트 베어즈 시절 만들어진 세장의 앨범들일 것이다. 소프트 머쉰과 공의 실험 정신이 비교적 내성적이고 개인적 성향을 지닌 것이었음에 대해 이들은 대단히 외향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들은 애매모호한 우회적 태도보다는 직설적이고 명쾌한 선언을 보다 선호했으며 인터뷰 등에서 자신의 입장을 직설적이고 논리적으로 표명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정치와 문화 그리고 음악의 사회적 효과에 대한 성찰이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진 것은 헨리 카우의 멤버들이 다른 뮤지션들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국지전을 벌이기 시작한 후 부터이다. 더 워크(The Work), 카시버(Cassiver), 뉴스 프롬 바벨(News Form Babel), 스켈레톤 크루(Skeleton Crew)등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사운드를 도입하거나 한편으론 록 음악의 야수적 공격성을 더욱 강화하는 등, 특정 형식을 고집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헨리카우 패밀리의 음악적 전통이기도 했다. 사운드 그 자체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그 내용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거듭했으며, 그것이 사회와 대중에 대해 어떠한 힘과 효과를 가질 것인지 대한 토론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는 방향 선회와 멤버들의 탈퇴 그리고 새로운 그룹의 결성 등으로 나타났다. 프레드 프리쓰와 크리스 커틀러의 입장 대립, 아트 베어즈의 비-페미니스트적 가사에 대한 린제이 쿠퍼의 반발, 슬랩 해피의 안소니 무어나 피터 브레그바드의 음악에 나타난 관념적이고 탈 정치적인 태도 등, 물론 그들이 대중을 폭 넓게 끌어안는데 실패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비타협의 결과이지 적어도 대중을 고려치 않은 순수 실험주의 때문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과연 그 누가 이 두마리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단 말인가?
헨리 카우 패밀리의 뮤지션들이 보여준 아방가르드는 자신의 뒤나 주변을 돌아다보지 않거나 과거와 현재를 부정하는 전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디디고 있는 지금-여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우선시 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지는 현실과 살아 있는 인간들을 향하고 있으며 형식에 있어선 과거와 현재의 요소들을 채용하길 주저치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전위는 전방위적 전위였다.
이들의 음악이 대중적 감성에 익숙한 이들의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은 분명 아니다. 게다가 이들이 전달하고자 한 내용들은 서양 문화에 폭 넓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언어부터가 다른 우리에게는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그것을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해도 그 뜨거운 가슴으로부터의 거친 숨결과 냉철한 이성의 서늘함을 느낄 수 있다. 그건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그들 역시 음악에서 인간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글 – 전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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