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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48
마음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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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34012
2009.01.17 (13:47:19)
ARTIST:  Le Orme 
COUNTRY:  Italy 
GENRE:  Italian Symphonic Prog 
ALBUM:  Ad Gloriam (1969) - Car Juke Box
L'Aurora (1970) - Car Juke Box
Collage (1971) - Philips
Uomo di Pezza (1972) - Philips
Felona E Sonora (1973) - Philips
Contrappunti (1974) - Philips
In Concerto (1974) - Philips
Smogmagica (1975) - Philips
Verita Nascote (1976) - Philips
Storia O Leggenda (1977) - Philips
Florian (1979) - Philips
Piccola Rhapsodia dell'Ape (1980) - Philips
Venerdi (1982) - DDD
Orme (1990) - Philips
Biancaneve(1995) - Re-release of "Venerdi" from 1982
Il Fiume (1996) - Tring
Amico di Ieri (1997) - Tring
Elementi (2001) - Crisler
L'infinito (2005) - Crisler 
MEMBER:  1966-67
Aldo Tagliapietra (vocals, guitar)
Nino Smeraldi (guitar)
Claudio Galieti (bass)
Marino Rebeschini (drums)

1967
Rebeschini replaced by:
Giuseppe "Michi" Dei Rossi (drums)

1968-70
Aldo Tagliapietra (vocals, guitar)
Nino Smeraldi (guitar)
Antonio "Toni" Pagliuca (keyboards)
Claudio Galieti (bass)
Michi Dei Rossi (drums)

1969
Galieti quits, De Rossi temporarily replaced by
Dave Baker (drums)

1970-75
Aldo Tagliapietra (vocals, bass, guitar)
Toni Pagliuca (keyboards)
Michi Dei Rossi (drums)

1975
enters:
Tolo Marton (guitar)

1976-80
Marton replaced by:
Germano Serafin (guitar)

1980-82 and again 1986-1990
Aldo Tagliapietra (vocals, bass, guitar)
Toni Pagliuca (keyboards)
Michi Dei Rossi (drums)

1996-2000
Aldo Tagliapietra (vocals, bass, guitar)
Michele Bon (keyboards)
Francesco Sartori (keyboards)
Michi Dei Rossi (drums)

2001
Sartori replaced by
Andrea Bassato (keyboards, violin) 
원본출처:   
나와 의형제를 맺은 Mr.Docr는 굉장한 스피드광이다. 그는 베네치아 산타루치아로부터 메스뜨레 도심부 이전까지 170Km이상의 속도를 결코 늦추지 않았다. 찌그러진 골동품과도 같은 카 스테레오로부터 그의 파이프 오르간주자가 연주하는 웅장한 사운드가 흘러나와 마치 영화 Pha19652177.jpgedra의 끝장면을 실행에 옮기는 것 같았다. Speed Indicator가 200km위로 치솟을 때마다 옆좌석에서 초조해 하고 있던 나는 가상의 브레이크 페달을 열심히 밟고 있었다. 그가 그 이후 두차례의 대형 교통사고를 일으켰다는 것이 충분히이해가 갔다. 우리가 메스뜨레에 도착했을때 주위는 벌써 어두워져 있었고 및 도시인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와는 완전히 다른근대 도시적인 Mestre의 풍채가 드러나고 있었다. Mr. Doctor는 Devil Doll의리허설을 뒤로 미룬체 Le Orme의 리더였던 Aldo Tagliapietra와 나와의 인터유를 위해 안내자역할로써 먼길을 달려온것이었다. 우리가 골목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주택가에 도착, 아담한 집앞에 섰을때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의 등불이 켜지고Aldo가 우리를 미소와 함께 반겨주었다. 그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초 음악잡지의 커버를 장식했던 그 당시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Aldo-(Aldo Tagliapietra : 1945년 2월 20일생)의 얼굴이 현관의 등불아래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는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그의 안내로 골동품으로 가득찬 그의 응접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곳에는 민도를 비롯한 동양의 각종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부처상 등등 동양종교와 철학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가 동양에 대한 남달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우리가 나누었던 첫번째 대화는 앨범"Felona E Sorona"에 대한 것이었다.V.D.G.G.의 Peter Hammill이 어떻게 그 앨범의 영어버젼을 담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놀라운 대답을 들려주었다. Le Orme가 요청한 것이 아니라 Peter Hammill 자신이 레코드사측에 "Felona E Sorona"의 영어음반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해 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태리 뮤지션들사이에서 Peter Hammill의 인기도는 최고였다. 이태리 뮤지션들이 가장 존경하던 영국의 뮤지션이 바로 Peter Hammill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Le Orme의 작품을 영어로 개사해 주겠다고 직접 나섰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고,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필자 역시도 Le Orme의 세계시장 진출을 위하여 이태리 레코드사측이나 그룹 Le Orme가 직접 Peter Hammill에게 영어가사를 부탁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지배적이었다. 두번째 질문은 Le Orme의 음악 스타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의 음악 스타일은 누가 듣더라도 영국의 EL & P를 담아있다. 따라서 EL & P를 모방했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유추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잘못되었다고 그는 반박했다. 그들의 사운드와 음악 스타일은 Le Orme고유의 것이라는 것이다. 2시간 동안에 걸친 대화속에서 그로부터 받았던 인상은 매우 섬세하고 자신의 음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뮤지션이라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이태리인의 성격과 기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았고, 논리적이고 또한 자신의 음악에 대한 신념을 확실히 주장할 수 있는 인기였다. 그는 끝으로 100만 리라에 거래되고 있는 그들의 데뷰작 AD Gloriam의 해적음반을 구경시켜 주면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해적음반이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하여 우리 세명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끝으로 그는 자신과 가장 우정이 두터운Mauro Pagani(P.F.M의 바이올린 주자)와 Francesco(Banco의 보컬리스트)의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그의 덕택으로 필자는 로마에서Francesco와 간단한 전화 인터뷰를 가질 수 있었다.

Le Orme의 역사
67511.jpgMestre 출신으로 화학분야의 전문가가 되고자 했었던, 그러나그 희망을 이루지 못했던 Toni Pagliuca, 베네치아의 명물 산데리어를 만들기 보다는 음악을 선택했던, Murano출신의 유리가게 주인 아들인 Aldo Tagliapietra, 목수출신으로 Michi라고 불리줬던 Burano출신의Giuseppe Dei Rossi등이 LeOrme의 결성 멤버들이다. 그들은 이태리 팝 음악의 역사에 커다랗고 뚜렷한 혼적을 남겨 놓았던 후기 Beat의 계열이다. Le Orme는1970년대 그룹들 중에서 항상 첫번째 대열에 위치해 있었다. 그들이 무명 그룹이었던 1960년대 말에는 Beat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New Trolls와 Formula 3의 시대가 도래했고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태리에 Progressive Rock시대가Le Orme의 앨범 "Collage"와 더불어 비롯된다. 낭만적이고 어떻게 보면 영국의EL & P를 모방하는 듯한 그들의 음악은 새로운 감각에 대한 이태리식의 음악적 답변이었다. Pagliuca의 흥분된 건반을 중심으로 이태리 서민의 춤곡에서 영감을 얻은 Le Orme는 본질적이고 체계적인 연주기법과 더불어 Progressive Rock 태동의 기간이었던 70년대초에 이태리 감각에맞는, 세련된 귀족적인 음악적 소제들을 가지고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Beat(1967년)시대로부터 비롯된다. 베이시스트이자 싱어인 Aldo Tagliapietra가 리더로써Toni Pagliuca와 Michi Dei Rossi를 받아드려 "Opoppi"라는 작은 그룹을 조직했다. Toni는 Mestre의 San Marco지역의 가까운 카톨릭 교회에서 올겐을 연주하게 될 때까지, 소년기 동안 장난감용 피아노를 가지고 건반을 마스터했던 인물이었다. Toni는 올겐에 대한 정열로 가득차있었다. 그는 Le Orme에 가입 하자마자Milano로 달려가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비용으로 하몬드 오르간을 구입했다. 그룹에는 Claudio Galieti와 Nino Smeraldi가 가입되어 5인조 편성의 그룹이 되었고 이들은 Le Orme의 첫 노래를 공동 제작했다. Michi의 병역기간 동안 드럼에는 영국 출신의 Dave Baker가 잠시 기용되었다. 그리고 Car Juke Box레코드사로부터 그들의 데뷰싱글 'Senti L'Estate che Toma'가 1968년 여름에 발표된다. 당시 미국 West Coast의 Psychedelic Movements에 크게 영향을 받은 그들의 데뷰싱글은 고음의 노이즈로 시작되는 화음과 보컬을 중시한 작품이었다. 그들은 1968년 Milano로 진출하여"Ad Gloriam"이라고 불리우는 첫 앨범을 발표한다. 'Fumo', 'Mita Mita', 'L'aurora'등의 노래가 이 음반에 담겨 있었다. 이 앨범이 발표될 당시, Le Orme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이 시기까지 Le Orme는 5인조였다. 1960년대말 미국 그룹의 앨범커버를 닮은 그들 데류앨범에 담긴 그룹멤버들의사진을 보지 않고서는 그들이 5인조그룹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없다. 그후, Nino Smeraldi(Guitar, Vocal)와 Claudio Galieti(Bass, Cello)가 그룹을 탈퇴하면서 Le Orme는 단순한 편성의 3인조로 탈바꿈한다. 1970년, 축소된 인원으로 Le Orme는 "여름축제"무대위에 올랐고 같은해 두번째 앨범 "L'Aurora Delle Orme"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데뷰앨범의 곡들과 초창기 싱글들을 모아 놓은 한정 발매 편집음반이었다.

"COLLAGE"
(Le Orme의 첫번째 성공)

1960년대말, Le Orme는 음악적인 측면에서 외국으로부터,특히 영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어 그들이 Traffic의 Steve Winwood에게 받은 영향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이태리 청중은 Le Orme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전혀 히트한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이태리에서 발간된 음악잡지나 사전등에서는 Le Orme에 대한 기사를 찾아 볼수 없다. 그러나 2년후, 트리오로 탈바꿈한 Le Orme는 새로운 감각과 국제적인 록, 특히 Emerson Lake & Palmer, Genesis, King 5660336.jpgCrimson, Yes등 당대에 유명했던 그룹이 지니고 있었던 소위 클래식을 모방한듯하면서도 낭만적인 록의 세계를 표출하는 새로운 음악을 들고 등장한다. 1971년 초반, Toni Pagliuca는 정확히 두가지 이유때문에 런던으로 향했다. 그의 런던행의 임무는 신세사이저를 구입하는 것이었으며, 그 보다 더 중요한 임무는 영국의 유명한 건반주자들을 가깝게 알고 지내는 것이었다. 그들로부터 새로운 연주 기법을 배우고 익혀서, 이태리에서 는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새로운 기술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명 그룹들의 공연장을 찾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는 Deep Purple의 공연장에서Jon Lord의 키보드 주법을, Rare Bird의 무대에서는 함께하는 Graham Field의 손놀림을 유심히 관찰했다. 또한 EL& P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Keith Emseron의 녹음장면을 어렵게 관찰할수 있었다. 그는 高價의 신세사이저를 구입하지 못하고 이태리 Mestre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불타는 정열과 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때 이태리에서는 외국 레코드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그는 이태리의 청중들도 곧 Rock에 의해 깨어나리라는 신념에 불타오른다. 그러나 당시 그룹 멤버들의 회고에 따르면 Le Orme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그룹은 영국출신의 트리오 Quartermass(JohnGustafsson, Pete Robinson, Mick Underwood)였다. Le Orme의 두번째 앨범이 Milano의 Phonogram 스튜디오에서 녹음되고 있는 동안 Quartermass의 앨범은 그룹멤버들의 음악적 방향을 안내하는 나침판과도 같은 것이었다. 1971년 초여름에 Collage가 발표된다. 즉흥연주로 가득찬 연주공간속에 화려하고 웅장한 건반터치가 가장 돋보이는 혁신적인 음반이었다. 건반위주로 노래없이 바로 앨범의 주제를 이끌어 내는 도전적이며 강렬한 작품이었다. 건반의 효과적인 사용, 음색에 대한 그들의 피나는 탐구가 엿보인다. "올갠에 Toni Pagliuca, 베이스에 Aldo Tagliapietra..."라는 Credit이 말해주듯이, 그룹의 주무기로써 무엇보다도 건반을 내세우는 Le Orme 음악 스타일의 변화는 1971-72년쯤, 실제로 영국의록 에서 불어왔던 음악현상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Le Orme를 알기 시작한 청중들은 당연히 키보드주자가 이 그룹의 리더일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각 개인의 우수한연주 기교를 융합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앨범의 뒷면에서 그들의 실험정신을, 그리고 앨범의 앞면에서 화려한 바로크식의 기교 넘치는 연주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제대로 언급 되어지지 않았던 "Michi"라고 불리우는 Giuseppe DeiRossi는 Le Orme의 드럼 담당이다. 그는 클래식을 모방하는 듯 하면서도 낭만적인 록에 깊이 빠져있는 연주자로, 서민적인 감각과 순수성을 민요로부터 영감을 얻어내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 음반속에 담겨 있는 가사들은 멜로디 연구에 의해 생산된 Pagliuca와 Tagliapietra의 공동작이다. 'Era Inverno', 'Morte diun Fiore', 'Sguardo Verso il Cielo' 등은 Le Orme의 연주력보다는 전달 내용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 Luis E Bacalov의 아이디어로 탄생된 New Trolls의 "Concerto Crosse Per 1"를 제외한다면, 이태리에서 "Collage"와 같은 음반을 실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며 그후 이와 비슷한 부류적 음반들이 이태리 음악시장에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러한 음반들은 Le Orme의 "Collage"를 표본으로 삼고 있었다. 1972년에 발표된 Premia Fomena Marcoru의 데류작 "Storia di un Minuto", Osanna의"L'uomo", Delirium의 "Dolce Acqua", 그리고 Banco Del Mutuo Soccorso의 데뷰앨범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영국 그룹들의 독무대였던 이태리Rock음반 시장속에서 Le Orme의"Collage"는 6달동안에 15,000장의 판매고를 넘어졌다. 미, 영국의 음반시장과는 비교가 안될 판매 숫자이지만 아무튼 이태리 그룹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판매고였다. Radio 매체도 그들에 대해서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Per Voi Giovani"라는 프로그램에서 이태리 그룹으로서는 Le Orme가 가장 인기있는 팀으로 등장하게 된다. 당시 이 프로그램 최고의 외국그룹은 Pink Floyd였다. 그 다음해(1972년)에 로마의 Piper Club에서 개최된 Controcanzonissima경연에서 Le Orme는 우수한 그룹들사이에 위치한다. 이 공연에서 Le Orme는새로운 작품 "Uomo di Pezza"를 연주했고, 이 작품은 앵콜을 받았다. 이 앨범에 담긴 'Gioco di Bambina' 라는 곡은 그후 힛챠트 상위권으로 진입했다. 이 앨범은 이전의 "Ad Gloriam", "Collage"와는 달리 영국 스타일에서 다소 벗어난 작품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더욱 영국적인 향기가진하게 풍기지만 내면적으로는 이태리 민속음악을 통한 서민의 감각을 발견할 수있다. 또한, 트리오 각 개인의 분해되는 개성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드러머Michi의 활약이 매우 돋보인다. 운율적으로 보다 더 균형잡히고 보다 더 심오한 가사를 쓰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도 눈에 띤다. 어쿠스틱 기타는 마치 만돌린처럼 연주된다. 그만큼 기교가 뛰어나다. 이전에 사용되었던 Moog는 이 앨범부터 Synthesizer로 교체된다. "Collage"의 경우 빈번하게 발전기가 사용되어 졌었다. 아코디온이나 플룻의 도입도 어렴풋이 노orme.jpg출된다. 앨범커버는 훌륭한 현대 화가 Walter Mac Mazzieri에 의해 창조되어 졌다.수록곡들 중에서 마지막 곡인 'Alienazione'는 스튜디오에서 거의 즉흥적으로 탄생한 연주곡이다. 이 곡에서 Michi의 즉흥적인 드럼 솔로가 눈부시게 전개된다. 앨범커버가 표출하고 있는 꿈속의 환상적인 그림처럼 가사도 어떤 남자 앞에 여인의 형상이 꼭두각시 인형이나 광대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Uomodi Pezza"의 암시적인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첫곡인 'Una Doloezza Huova'의 도입부분에서 J.S.Bach의 Ciaccona테마를 두번정도 들을 수 있다. 두번째 곡 'Gioco di Bimba'는 힛 챠트 상위권에 단숨에 진입하면서 커다란 대중적 성공을안겨다 주었다.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일깨워 주는 듯 왈츠풍의 경쾌한 리듬으로 전개되는 곡이다. 그 속에 담긴 가사는 순수함을 상징하는 하얀 옷을 입은 몽유병자에 대한 것이다. 갑자기 몽유병의 기운이 돌발, 순진무구한 여인의 감정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몽유병으로 한 여인을 놀라게 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Io non - cosi...!!(나는 그녀를 그렇게 깨우고 싶지 않았다!!)"라고 이 곡은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에서 발표되었다. 이것이 Le Orme의 첫번째 세계시장 진출이었다. 한편 'Figura di Cartone'는 병원에 갇혀있는 한 정신병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음악은 미친 여인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 외부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이 여인에 의해서 비쳐지는 외부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즉, 그녀의 단순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그녀만의 아름다운 세계와 불치병의 정신병을 구제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묘사하고 있다. "Dai - Amori...(모든 나비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세요... 당신의 사랑을 바람에게 고백하세요...)"라는 아름다운 가사들이 담겨져 있다.한편, 이 앨범으로 Le Orme는 당대의 수퍼그룹들 Trip, P.F.K, Delirium등을 제치고 이태리 인기챠트의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1973년, Le Orme는 세계적인 성공작"Felona e Sorona"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Van Der Graaf Generator의 Peter Hammill의 호의로 영어로 번안되어 영국의 전문 Progressive Label인 Charisma를 통해 발매되었다. 이러한 계기로Le Orme는 영국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고 Aldo Tagliapietra는 이 공연에서Genesis의 Peter Gabriel이 걸쳤던 무대의상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옷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이때가 영국의 뮤지션들과 이태리 뮤진션들간의 교류가 가장 왕성하고 활발했던 시기였다. "Felona e Sorona"가 발표되기 1년전, Emerson Lake &Palmer는 "Pictures at on ExRbition"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클래식에 기반을 둔 독창성이 뛰어난 것으로 호평을 받으며 대단한 유행을 불러 일으켰다. Le Orme도 이에 커다란 자극을 받아 이와 비슷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Felona e Sorona"였다. 내용은 두개의 혹성 Felona와 Sorona에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견우와 직녀와 비슷한 전설을 테마로 하고 있는데,Felona는 사랑과 평화로 가득찬 밝은 별이고, Sorona는 어둠과 불행이 있는 별로이 두개의 별들은 마법의 주문에 의해서 만나게 된다. 이 음반은 Le Orme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야심작으로 신중하게 녹음되었고, 그만큼 많은 제작비가 투자되었다. 영국 런던에서도 Peter Hammill에 의해 영어로 된 음반이 제작된다. 영국에서의 공식적인 배급 레코드사는 Charisma였다. 이 Label에는Genesis와 Peter Hammill이 리더로 활약하고 있는 Van Der Graaf Generator가 존재하고 있었다. Charisma의사장인 Tony Stratton Smith는 Le Orme가 "Collage"를 발표했을 때부터Le Orme에게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Le Orme는 가장 유명하고명예로운 음악 클럽중의 하나인 Marquee에서 성공적인 무대를 펼친후 고국 이태리로 돌아온다. 이태리에서 두번째 골드 디스크를 받게 되구 그후 국내 그룹등급에서 제 1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이태리로 돌아온 후 그룹은 1월에Roma의 Brancaccio극장에서 공연을 갖는다. 이때 공연을 유일한 라이브 앨범으로 기록했다. 조명과 스모그, 건반위에서의 급선회, 파이프식으로된 종위의 퍼쿠션, 독특한 무대 의상등이 이때부터 LeOrme의 Trade Mark가 되어 주었다. Pagliuca는 대중들로부터 Keith Emerson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러나 그는 그가 영국의 것을 모방하는 것으로 인식한 대중들이 그를 비난하기 위해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오해했다. Rock Keyboardist로써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Keith Emerson과 자신을 비교한다는 그 자체가 그는 몹시 못마땅했다. Toni가 무대로 올라가는 동안 싱어이자 베이시스트인 Aldo는 요정처럼 무대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와 절친했던 한 친구는 그가 지성인이며 King Crimson의 Greg Lake, 그리고 Cream의 Jack Bruce를 대단히 좋아했었다고 말한다. Michi Dei Rossi는 Carl Palmer와 John Hiseman을 무척 좋아한다. 물론, 거장 Gingerorme4_250-locanda71.jpg Baker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다르다. 공연음반의 앞면은 22분의 미발표곡 'Truck ofFire'라는 Rock Symphony곡을 수록하고 있으며, 뒷면은 Le Orme의 유명한 곡들을 다시 수록하고 있는데 특히, Philips시대의 초창기 작품들이 담겨있다. 모든 공연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했던 Collage의 연주도 짧게 기록되어 있다. 1974년, Le Orme는 스튜디오로 돌아와서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즉흥성이 많이 배제된 작품, 보다 신중한 작품을 제작한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이 음반에 제목을 지어주는 일이었다. 이 작품은 이른바 "Contrappunti(대위법)"라고 이름이 붙여진다. 단지 3개의 악기로 그들은 7곡을 담고 있는데, 피아노, 올갠, 베이스, 드럼을 위한 7개의 토카타였다. 두번째 곡부터 흘러나오는 이 앨범에서의 가사들은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라기보다는 음악적 대화를 나타내는 악기와 같은 도구로써 사용된다. 이 앨범에서도Gian Piero Reverben가 커다란 도움을 주었음이 역력히 보인다. Reverberi는 제노바 태생으로 Gino Paoli, Luigi Tenco, Umberto Bindi등의 동료이자 음반 제작자로써 활약해왔던 Cantautore(심어송라이터)이다. Gian Piero Rrverberi는 앨범 "Collage"에서부터 Orme를 위하여 제작과 편곡에 참여했었다. Orme와 함께 그는 녹음실에서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클래식을Rock에 도입하는 과정에서 확실히 그룹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음반에서 우리는 'Aliante'라는 곡을 만나게 된다. 이 노래는 Michi의 리듬 연주에 의해 만들어진다. 'India'는 Aldo와 Toni의 몇달 전에 있었던 인도 여행의 보고서이기도 하다.이 노래는 두 아티스트들이 인도를 돌아보면서 느낀 인도 신화에 대한 커다란 실망감을 얘기해 주고 있다. 그 신화는 전쟁중인 자신의 나라를 배반하는, 사랑에 빠진한 여인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인도에서 그들은 길가에서 배고픔 때문에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발견했고 커다란 충격을받았다. "Contrappunt"는 비평가와 청중의 극소수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청중들은 그들의 음악이 무척 어려워졌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때 Le Orme는 Califolllia로 향하고 있었다. Premiata Forneria Marconi는 이미 운이 좋게도 미대륙에서 공연을 치루고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고 Le Orme는 P.F.M 이후의 주목받는 이태리 그룹으로써 미국시장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L.A의 한 스튜디오에서 그들은 성공적인 앨범 "Smogmagica"를 제작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의 싱글을 먼저 제작하고 나서 그룹의 새로운 멤버를 가입시킨다. 그는 이태리계 출신의 또 다른 기타리스트 Tolo Marton이다."Smogmagica"에서 Pagliuca는 이전과는 달리 중심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있다. 앨범 커버는 Genesis와 Van Der Graaf Generator 앨범커버 도안으로 유명한Paul Whitehead가 맡았다. Los Angeles와 같은 거대하고 기하학적인 대도시가 스모그(마약과 같은 연기)로 가득찬 배경의 질식할 것같은 이미지를 담고있다. 1976년 초, Le Orme는 이태리로 돌아와서 겨울의 순회공연의 야심을 갖는다. 그들은 새로운 공연 무대에서 연극적인 요소와 음악을 연결시키는 독특한 연출을 시도한다. Le Orme에 있어서 이 시기는 과대망상적 경향이 대단히 팽창하고 영국의 로맨틱한 록 음악에 대한 동경이 범람하던 시기였다. 한편 새로운 멤버로 참여한바 있는Tolo Marten은 Le Orme에 의해 새롭게 착수된 방향에 불만을 갖고 그룹을 떠났으며, 그의 후임으로 이제 막 17살이된 Germano Serafin가 기타리스트로 참여한다. 그러나 4인조 시대의 Le Orme가 발표했던 두매의 음반들은 아무런 성공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Inglese"라는앨범은 그리스 출신의 천재 뮤지션 Vangelis Papathanassiou의 런던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특히, Vangelis가직접 이 앨범의 제작자가 되어주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프랑스에서도 앨범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파리의 녹음실에서 녹음, 제작된 것으로 Le Orme가 파리에서 새로운 음악적 영감으로 탄생시킨 작품이었다. 앨범 제목은 "Verita Nascoste e Storia o Lessenda(감추어진 진실과 역사 또는 전설)"이었다. 이 앨범의 첫번째 파트에는 마약에 대한 화제를 다루고 있는 'Regina al Troubadour'와'Vedi Amsterdam'가 분리되어 있다.두번째 파트에서는 보다 더 듣기 좋은 멜로디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노orme7.jpg래들 'Se Io Lavoro', 'Un Angelo', 'Al Mercato Delle Pulci', 'Come Ua Giostra'와 같은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4인조 편성의 Le Orme는 점점 인기를 잃어갔고, 이태리뿐만 아니라 외국시장에서도 그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미래는 어둡기만 했다. 결국, Pagliuca를 비롯한 Le Orme멤버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은둔하면서, 무대를 잠시 떠나야겠다는 결정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그들의 의도는 좀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음악을 다시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백기를 갖은 후, 재충전하여 새로운 형식의 음악을 시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룹의 녹음실을 Mestle에 마련했으며 그들의 첫번째 성공작의 타이틀이었던 Collage를 스튜디오 이름으로 채택한다. 이로부터 새로워진 음악에 대한열정과 새로운 방향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리더이자 베이시스트인 Aldo Tagliapietra는 특히 첼로를 전문적으로 배웠고 Rock으로부터 발생되는 불만들을 해소해 버리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Le Orme는 1979년 4월, "Florian"을 녹음하게 된다. 그들은 이전부터 항상 고전음악에 심취되어 있었고 앨범 "Contrappunti"시기에도 역시 그것에 심취되어있었다. Classlc에 깊히 빠져있었음으로 다루고자 하는 악기들도 점점 클래식 악기들로 교체되기 시작한다. 베이스대신 첼로와 Classic Guitar, 전자 피아노와 신세사이저 대신에 Armoruum(리이드 오르간의일종)과 Harpsichord(Clavicembalo)를, 드럼 대신에의 비브라폰, 마림바나 Glockenspiel을, 일렉트릭 기타대신 바이올린과 대형 만돌린(Mandola), Bouzouki 등이 사용되어졌다. 이러한 악기들과 함께 Orme의 10번째 레코드 앨범 "Florian"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타이틀 "Florian"은 261년의 역사를 지닌 베네치아 San Marco광장의 매우 고상하고 오래되고 유명한 Florian커피숍에서 빌어 온 것이었다. 첫곡으로 수록된 타이틀 곡은 현악기와 비브라폰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스릴 넘치게 전개되는 급템포의 소품이다. 기존 Classic 소품들과 비교해 볼때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작이다. Vivaldi와 Grieg의 영향을 받은 LeOrme는 일상적인 표준의 틀에서 벗어나매우 세련되고 우아한 음악들을 소개하고있다. 그러나 이 음반에 담긴 곡들을 클래식 음악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클래식을 닮은 노래들이라고 부를수는 있을 것이다. 이 앨범은 "Collage"가나오던 시기인 10년전과 비교해서, 더욱정교하고 세련된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수록된 곡들 모두가 치밀한 기획, 녹음,제작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Florian"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곡중의 하나는 'Fine di un Viaggio'라는 곡으로, 이 노래는 1965년 Bob Dylan이 노래한 'Mr. Tambourine Man'에 대한회답식의 노래이다. 또한 몽상에 젖어 있는 한 마약 밀매인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가사내용은 '친구여, 꿈꾸는 것을그만 두세요... 내일은 이미 오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내가 당신에게 이것을 말하기 위해... Mr. Tambourine Man은 나에게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아요... 당신의 마술의 배는 아직 남아있지요...'라는마약에 반대하는 노래이다. 이 곡속에서탬버린효과를 담당한 드럼파트는 기타와만도린의 도움으로 템버린의 사용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앨범의 문을 여는 타이틀 곡과 연골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끝 곡 'El Gran Senser'는 베네치아의 오래된 속담의 지혜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피아노의 신선하고 깨끗한 선율로써 표현되는 옛 도시에 대한 영감과 서민의 순수함을 혼합한 작품으로 Le Orme라는 그룹의 명예속에 길이 남을 작품이다. 이 앨범 역시 공동제작자겸 녹음실 감독으로 Gian Piero Reverberi가 일을 맡았다. Gian은 밴드의 성공과 발전에 있어서 결코 해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와 꾸준히 전통음악과 새로운 orme9.jpg음악의 융합을 시도해 왔었던 Le Orme는 시대 조류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이 당시 세계 음악의 조류는 Disco와 Punk 그리고 New Wave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Le Orme의 이러한 시도는 순리에 대한도전이었다. 이러한 도전은 그들 옛 팬들과 고정 핀들에게는 커다란 호기심으로 받아들여졌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Le Orme는 지난 10년동안 제작자이자 친구로써 함께했었던 Gian Piero Rrverberi의 도움없이 새로운 앨범 "Piccola Rapeodia dell'Ape"를 Mestle에 위치한 그들 소유의 스튜디오 Collage에서 완성한다. 1980년 2월 10일부터 약 2주간에 걸쳐 녹음과 제작이 이루어진 이 앨범은 어쿠스틱 사운드를 내세운 Le Orme의 마지막 성공작이다. 이 작품은 영국의 로맨틱 록에 가까운 우아한 연주로 가득찬 수준작이었다. 앨범커버에서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속의 황금색 벌이 음악이 되어 Acoustic의, 자연의 소리들을 연출한다. 이 작품은 이전의 작품 Florian의 음악방향을 추종하고 있다. 실험적인 요소를 많이 함축하고 있는 본작으로 인하여 그들의 팬들은 점점 줄어들고, 음반 판매고에 있어서도 최저를 기록한다. 결국, Le Orme는 전속회사였던 Philips를 포기하고 소규모의 신생 레코드사 Drugolo의 Drogueria회사 (D.D.D.)와 새롭게 레코드 녹음계약에 서명한다. 그후 그룹의 4번째 멤버였던기타리스트 Germane Serafin가 독립하여 그룹은 원래의 3인조로 되돌아간다. 그리하여 70년대 Le Orme의 최전성기에 가까운 스타일과 전자 악기들이 다시 정제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위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Le Orme는 오랜 친구를 잃었고, 소속 레코드사도 잃었으며, 그리고 멤버까지 잃는 불운을 당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많은 팬들이 그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커타란 시련이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으나 이미 좌초되어버릴 상황까지 도달했다. 여기서 Le Orme는 'Venerdi'라는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1982년 초에 발표된 이 앨범은 사실상 Le Orme의 마지막레코드 녹음으로 기록된다. 이 앨범속에 나타난 35세의 남성들의 모습은 유행을 쫓는 와이셔츠와 백타이를 매고 있다."Collage"의 표지위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밀가루를 덮어 쓴, 긴머리와 수염을 가진 청바지의 청년들을 우리는 결코 찾을 수없으며 또한, "Florian"의 사진에서 입었던 반듯한 연미복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옛 명성을 뒷전에 두고 세련된, 대중감각에 맞는 "Marinai'라는 곡을 가지고 산레모 페스티발에 참가한다. 그 후 그들은 이전의 영광을 찾지 못했다. 여러 레코드사를 통하여 과거의 히트 곡들을 모은 편집앨범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1986년에는 가까운 일본에서 그들의 Live 앨범도 발매되었다. 최근 그들의 재결성과 함께 이태리의 손꼽는 휘귀음반 "L'aurora"과 "Beyond Leng"만을 제외하고 모든 앨범이 CD로 재발매되어 있다.
(성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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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Gloriam(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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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ge(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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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on Di Pezza(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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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ona & Sorona(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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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rappunti(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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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oqmagica(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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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ita' Nascoste(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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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ia O Leggenda(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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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ian(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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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cola Rapsodia Dell'Ape(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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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me(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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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ancaneve(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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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Fiume(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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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ico Di Ieri(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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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menti(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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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finito(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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