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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48
alicewonder
추천 수 : 38 / 0
조회 수 : 20492
2003.06.17 (18:54:08)
ARTIST:  BARCLAY JAMES HARVEST 
COUNTRY:  U.K 
GENRE:  Crossover Prog 
ALBUM:  Barclay James Harvest (1970)
Once Again (1971)
Barclay James Harvest And Other Short Stories (1971)
Baby James Harvest (1972)
Everyone Is Everybody Else (1974)
Time Honoured Ghosts (1975)
Octoberon (1976)
Gone to Earth (1977)
XII (1978)
Eyes of the Universe (1979)
Turn of the Tide (1981)
Ring of Changes (1983)
Victims of Circumstance (1984)
Face to Face (1987)
Welcome to the Show (1990)
Caught in the Light (1993)
River of Dreams (1997) 
MEMBER:  John Lees (lead guitar, vocals)
Woolly Wolstenholme (keyboards, vocals)
Melvin Pritchard (drums)
Les Holroyd (bass, vocals) 
원본출처:   

BARCLAY JAMES HARVEST

BJH는 흔히 예언자로 비유된다. 성경의 1968.jpg구약성서에 보면 예언자는 제 고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타지에서 알아준다는 구절이 나온다. 모국인 영국에서는 어떠한 명성과 부도 쌓지 못했지만 그 이외의 지역, 특히 독일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Barclay James Harvest.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그 어떤 아트록 그룹보다도 국내에 많은 앨범이 소개되기도 했다. 물론 Polydor 시절의 음반들만이 소개된 아쉬움은 있었지만 말이다. 


Barclay James Harvest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어디서 자료를 구할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면서 Harvest시절의 곡들을 모아놓은 컴파일레이션 앨범은 "The Harvest Years"를 꺼내어 플레이어에 걸었다. 무심코 Booklet을 뒤적이다가 아! 그렇지!라는 생각이 든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 책자엔 BJH의 팬 클럽 주소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즉시 팬클럽 회장인 Keith Domne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띄웠고, 약 한 달 만에 그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 물론 한국의 잘 나가는 잡지 Art Rock에 BJH가 소개된다는 점에 매우 기뻐하면서 자료와 BJH의 사진을 보내 준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서 온 편지를 읽다가 필자는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필자에게 자료를 보내주는 대신 자신이 전 세계의 BJH의 앨범들을 수집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H음반에서 나온 BJH의 앨범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앨범의 시리얼 넘버까지도 정확히 적은 상태로 말이다. 이 음반은 93년에 지적소유권 문제로 3,000원씩 하던 해적 CD였다.(물론 거기에 수록되어 있는 곡들은 기존의 CD를 불법으로 다시 마스터링한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 필자는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음반은 불법음반이며. 내용도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고, 그래도 정히 원한다면 보내주겠노라고.
그러나 이 사건은 내게 매니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한편으론 그동안 음악을 조금 안다고 설쳐대었던 나의 자만심을 반성하면서 말이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현재 국제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 팬클럽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Keith Domne에게 감사하며 그의 매니어 기질에 경의를 표한다.

태동
1968a.jpg60년대 초반, 영국의 록계는 비트 그룹의 성공으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주로 리듬앤드 블루스 스탠다드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65년 랭커셔에 있는 Oldham Art School에 다니던 Stuart Wolstenholme과 John Lees라는 두 청년이 Rock and roll 스타일의 The Sorcerers를 결성하고 66년에는 The Keepers로, 그 후 블루스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해 The Blues Keepers로 재차 이름을 바꾼다.
한편, Les Holroyd와 Mel Pritchard는 Oldham의 다른 밴드인 Heart & Soul & The Wicked에서 활동하고 있던 오랜 친구 사이었다. 그들은 어느날 The Blues Keepers의 라이브 공연을 보게 되는데 당시 Heart & Soul & The Wicked의 리드 기타리스트가 탈퇴한 상태였다. 그들은 John Lees에게 다가가 그 공백을 메워줄 것을 제안했고 죤과 울리는자신들의 그룹명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 총 6명의 새로운 라인업으로 구성된 The Blues Keepers를 탄생 시킨다.
이 그룹은 주로 라이브를 위주로 했다. 이 라인업은 출발부터 약간 불안해서 리드싱어였던 Rob Buckely가 교사가 되기위해 활동을 중단했고, 결국 오래지 않아 그룹은 4인조로 줄어들었다. 이 때가 66년으로 이들은 어떤 음반도 제작하지 않았지만, 음악은 매우 진지한 것이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실질적인 Barclay James Harvest가 탄생하는 것이다. 멤버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John Lees(G, Vo), Stuart <Wooly> Wolstenholme(Key, Vo), Les Holroyd(B, Vo), Mel Pritchard(D).

출발
1970bjha.jpg이들의 재능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후에 그들의 첫 번째 앨범의 매니저가 된 John Crowther였다. 그는 Saddleworth근교의 작은 마을에 있는 18세기 시대의 농장을 구입해서 그들이 음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BJH의 곡들에서 전원적인 냄새가 짙게 배어나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출발에 근거한다고 볼수 있다.
1967년 6월, 자신들의 직업을 뒤로한채 이 농장으로 주거지를 옮긴 네 명의 멤버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래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또한 분위기 쇄신과 현대적 이미지를 살리기 위한 새로운 그룹명을 필요로 했다. 멤버들은 많은 아이디어를 냈고, 어떤 모자에서 힌트를 얻어 67년 9월에 Barclay James Harvest라는 긴 이름이 탄생한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맨체스터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공식적인 첫 공연이 이루어 진다.
BJH가 주요 레퍼토리로 삼은 것은 자신들의 노래와 Paul Simon, Incredible String Band, Love, Byrds의 노래였다 그러나 다른 그룹과의 차별성이 없으면 단순한 모방으로 끝나는 법. BJH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멤버들은 독특한 복장을 하고 첼로, 오보에, 프렌치 혼 등 팝계에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악기들을 사용함으로써 주목을 받았고, 드디어 68년 초에 Granada TV방송국은 그들의 첫 싱글 <Early Morning>을 담고있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내보내게 되고, 후에 BJH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멜로트론이라는 장치도 함께 소개되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Crowther는 여러 곡이 담긴 데모 테잎을 런던의 EMI로 보내게 되고 EMI는 그 노래들중 <Early Morning / Mr. Sunshine>을 선택한다. 비록 이 싱글은 히트하지 못하지만 BBC 방송국의 John Peel같은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게되고, BJH는 방송에 출연해 이 싱글과 <I Can't Go On Without You>, <Eden Unobtainable>등을 소개한다.
이곡들은 레코딩의 기술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멜로트론의 사용이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다. 한마디로 신선함과 고유한 먹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특히 <Eden Unobtainable>에서 들을수 있는 Wooly의 멜로트론에 의해 어레인지된 오케스트라 스타일은 앞으로 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음악활동을 전개 할 것인가를 예시한 것이었다.
방송출연과 싱글의 발매로 어느정도 주목을 끌긴 하지만 Crowther 개인이 독자적인 방법으로 음반을 제작하는 네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결국 BJH는 69년에 EMI와 정식 계약을 맺는다. 이와 함께 서서히 붐을 일으키고 있던 프로그레시브 록을 전문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EMI는 자회사인 신흥 레이블 Harvest를 만든다. 현재까지도 이 레이블의 이름이 BJH의 이름으로부터 온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다. 그러나 BJH의 팬들은 이 레이블이 BJH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6월에 EMI와의 계약 후 첫 번째이자 그룹의 두 번째 싱글 <Brother Thrush / Poor Wages>가 발매된다. 비틀즈와 핑크플로이드의 작품을 프로듀서 해주었던 Norman Smith가 프로듀서를 맡아 주었다. BJH는 이 싱글을 홍보하기 위해 많은 공연을 하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톱 텐 히트곡 <Race With The Devil>을 연주한 The Gun과 함께 런던의 Roundhouse에서의 공연도 포함된다.  
이 공연 기간 중 BJH는 후에 The Enid를 결성하는 Robert John Godfrey를 만나게 된다. 그는 클래식을 전공한 학생들로 구성된 The BJH Orchestra를 만드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자신은 편곡을 담당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오케스트라는 BJH에게 독특한 음악적 성취를 안겨다 주고, 그들의 인기를 높이는 원동력이 되지만, 운영에 따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은 경제적 파멸의 길로 이끈다.

Barclay James Harvest & Once Again
barclay.jpgonce.jpg69년 11월 Norman Smith의 프로듀스로 Abbey Road에서 데뷔앨범의 녹음이 시작되고 다섯달 만인 70년 6월에 발매된다. 이 앨범은 비록 데뷔앨범이긴 하지만 BJH가 이미 한번의 변화를 겪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창기의 2개의 싱글에서 느낄수 있었던 단순하면서도, 전원적이던 사운드는 키보드와 멜로트론의 사용, 복잡한 오케스트라의 등장으로 록적인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 웅장한 느낌을 많이 풍기고 있다. 12분여에 달하는 대곡 <Dark Now My Sky>는 이러한 특징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라이브에서 또 하나의 명곡 <The Iron Man>과 함께 애청곡이 되었다.
역시 Norman Smith의 프로듀스로 두 번째 앨범 "Once Again"이 71년 2월 발표된다.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나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이 앨범을 들어보면 BJH가 방향성을 잡았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고전인 <Morcking Bird>, <She Said>를 비롯해 <Happy Old World>와 <Song for Dying>같은 황량함이 느껴지는 곡들, <Galadriel>같은 전원풍의 곡에 이르기까지 겨우 두 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한 젊은 밴드에게는 놀랄만큼 성숙된 작품이었다. BJH는 Harvest 레이블에서 발표한 앨범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앨범을 통해 많은 새로운 팬들을 확보하게 된다. 홍보를 위한 공연에서는 Caravan의 보조밴드로 출연하기도 했고,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는 후에 Robert John Godfrey를 대신해서 BJH Orchestra의 편곡자로 활약하는 Martyn Ford가 이끌었던 베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공연한다.

BJH and Other Short Stories
other.jpg계속되는 정력적인 활동은 같은 해 11월에 "BJH and Other Short Stories"로 열매 맺는다. Norman Smith가 <Hurricane> Smith 라는 이름으로 <Don't Let It Die>라는 곡의 녹음으로 바빴기 때문에 Pretty Things의 베이시스트 Wally Allen에 의해 프로듀스된 이 앨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 앨범과 다름이 없이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Medicine Man>, <The Poet / After The Day>같은 클래식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다. <Harry's Song>에서는 키보드가 빠져있고 기타와 보컬이 오버더빙 되는 등 완성되지 못한 형태로 발표되었음이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고 Harvest사는 이 앨범에서 싱글 커트를 하지 않았다.
71년은 BJH에게 있어 활발한 활동의 시기였다. 2개의 앨범이 발표되었고 활발한 투어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음악적 성공과 상업적 성공이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듯이 이 앨범들은 비평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판매고가 그리 신통한 편은 아니었다. 또한 오케스트라를 대동한 투어의 비용은 점점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난관을 정면 돌파하는 방법으로 거의 1년여에 걸친 투어를 감행하지만 결국 그들의 선택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72년 여름 런던 타워에서의 콘서트가 느닷없이 단축되었고, 인종차별 정책을 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공연으로 다른 음악인들의 비난을 받게된다. 9월에 <Brethless / When the City Sleep>이라는 싱글이 BomBadil 이라는 그룹명으로 발표된다. 팝적인 경향을 짙게 풍기는 이 두곡은 그들의 베스트 앨범에서도 들을 수 있다.

침체기
baby.jpg몇차례의 공연 후 영국으로 돌아온 BJH는 갑자기 프로듀서도 없이 2주만에 새로운 앨범은 만든다. 원래 이 앨범은 한 면을 멤버들의 개인 작품에 할애하는 2매 짜리인 <Four Works>라는 타이틀로 계획되었으나 개인의 작품들이 완성되지 못해 1매짜리 "Baby James Harvest"로 발매된다. 커다란 화분 속에 꼬마가 들어가 있는 인상적인 커버와 대곡 <Summer Sollier>로 우리나라 팬들에게 지명도가 높은 앨범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응집력과 세련됨이 부족한 작품이었다. 누구도 이 앨범에 주목하지 않았다. 게다가 앨범 발매 불과 몇주전에 EMI가 갑작스럽게 편집앨범 "Early Morning Onwards"의 발매를 결정함으로서 판매고에도 많은 타격을 받았다.
이 앨범의 홍보를 위한 투어 기간중 남아프리카의 인종 분리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피켓시위를 벌이고, 결국 BJH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진 유럽 공연은 emoorig.jpg또 하나의 시련이었다. 콘서트를 치르면서 비용 때문에 매니저와 오해가 생기고 많은 빚을 지게 된다. 유고에서는 돈 대신 올랜과 기타를 받는 경우도 생긴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긴 국경 분쟁으로 모든 장비는 다 압류당한다. BJH는 빈손으로 돌아왔으며 빈털털이가 되었다.
John, Les, Wooly는 솔로앨범 준비를 하고 John의 "A Major Fancy"가 73년 1월에 완성된다. 그러나 설상가상이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매니저와의 문제는 법정으로 확대되었고, 7년 내내 그들을 괴롭혔다. 그해 7월 15일의 White City 스타디움에서의 공연에서는 John Lees가 많은 비로 무대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감전사할 뻔한 위기도 겪는다. EMI는 Harvest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BJH를 그들의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메이져 레이블의 횡포였으며 BJH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된 것이다. 레코딩 계약도 없었고,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으며, 매니져도 없는 상태야T다. Harvest에서 6월에 발매될 예정이었던 John의 솔로 앨범역시 발매가 취소되었다. 4년 후 EMI는 BJH가 Polydor로 이적한 후 다시 인기를 얻게되자 이를 Harvest에서 발매한다. John에게는 안된 얘기지만 꼴 좋게도 이 앨범은 인기를 얻지 못한다.

재기 그리고 Polydor 시대
그러나 새옹지마란 말이 있듯이 세상일이란 것이 항상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는 법은 아니어서,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계속된 eiee.jpg정규 라이브 공연을 통해 BJH는 힘을 되찾을 수 있었고, Strawberry 스튜디오에서 녹음 도중 만난 Eric Stewart의 도움으로 맨체스터에 있는 Kennedy Street Enterpriess와 계약한다. 그리고 이 회사는 그해 말에 Polydor와 계약한다. 이제 BJH를 덮고 있던 불운의 구름이 가시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던 오케스트라를 대동한 콘서트는 이제 끝났다. 무대 세트도 바뀌어야 했다. 오케스트라 소리를 대체할수 있는 음을 만들어야 했고, 이는 그들이 보다 자유로운 연주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반면에 오케스타라 없이 투어를 해야 했기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악기로 다시 오케스트라 편곡을 해야했다. 이는 당연히 더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해야 했다. 이는 분명이 복잡한 작업이었지만 의외로 빠른 속도로 BJH는 이에 적응했고 이전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대체한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74년 Polydor에서 발매된 첫 앨범 "Everyone Is Everybody Else"는 이러한 새로운 방향성을october.jpg 보여주는 것으로 이미 Black Sabbath의 2매의 앨범에서 프로듀서를 담당했던 Rodger Bain이 맡아 주었다. BJH 특유의 달콤함과 섬세함, 서정미는 여전했지만 오케스트라는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새로운 출발을 맞아 멤버들의 활기와 열정이 느껴지기도 하며, John Peel은 이 앨범에 대해 격찬했다.
이 앨범의 홍보차 진행된 투어를 담은 Live앨범 "Barclay James Harvest Live"를 11월에 발표한 BJH는 다음 앨범을 위해 San Francisco로 가서 Neil  Young의 프로듀서 Eliot Mazer와 함께 일한다.
75, 76년은 지속적인 성장의 시기였다. 75년 "Time Honoured Ghosts"가 Eliot Mazer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레코딩 되었고, 76년 결성 10주년 기념음반이자 미국 진출의 신호탄이 된 "Octogern"은 순수하게 BJH만의 힘으로 만들어 진다. 경제적 위기, EMI로부터의 방출 등 아픔을 겪은 BJH는 다시 자신감을 얻어가고 있었다. 특히 <May Day>의 끝부분의 코러스 편곡부분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BJH는 이전의 그 어떤 때보다도 인기를 얻고 있었고 재정 상태 또한 이상이 없었다. 이러한 새로운 인기에 고무된 EMI는 뒤늦게 John Lees의 오랫동안 잊혀진 솔로 앨범 "A Major Fancy"를 발매한다. 한편 초창기 BJH Orchestra를 담당했던 Robert John Godfrey가 이끄는 그룹 The Enid가 76년 첫 모습을 나타낸다.

지속적인 성장과 독일에서의 성공
Mandalaband의 Davy Rohl과 함께 만든 스튜디오 앨범 "Gone to Earth"가 77년 9월에 발표된다. 약물 과용에 대한 위험을 1975polypromo2.jpg노래한 <Hymn>은 라이브에서도 그들의 빼놓을 수 없는 레퍼토리가 된다. 이 앨범은 Polydor로 이적후에 발표된 앨범들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작품이긴 하지만 이전 앨범들보다 그 음악적 영역을 넓혀 당시 팝계를 주도하고 있던 펑크 물결을 뚫고 BJH의 이름을 더욱 널리 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아트록 팬이 아니더라도 BJH의 이름을 아는 청자들이 있는 이유는 이 앨범에 들어 있는 <Poor Man's Moody Blues>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독일에서의 성공으로, 발매 첫해 15만장이 팔리며 160주 이상 챠트에 머무른다.
<Caught Live>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겨냥해서 계획된 2장짜리 라이브 앨범의 타이틀은 Moody Blues의 라이브 앨범과 혼동할 우려가 있다는 팬들의 지적에 따라 "Live Tapes"로 지어졌다. 여러번의 지연후에 78년 4월에 발매된 이 앨범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는 실패, 독일과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성공한다. 이제 BJH는 Polydor의 보배가 되었다.
멤버 네명 전원과 프로듀서 Davy Rohl이 참여한 프로젝트 그룹 Mandalaband의 2번째 앨범 "Eye of wender"의 캠페인이 다음 앨범의 제작과 겹치는 바람에 BJH는 Martin Lawrence라는 이름의 프로듀서를 기용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들의 12번째 앨범인 동시에 그룹 결성 12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붙여진 "XII"가 78년 9월 발매된다. 이 앨범으로 BJH는 또 한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사운드는 이전의 완전함 보다는 강렬함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개인의 윤리적인 측면을 부각시켰던 가사들은 사회적인 테마로 옮겨간다. 또한 과학 소설을 즐겨 읽었던 John의 영향으로 우주젓인 소재가 다루어 지기도 한다. 분단의 상징이기도 한 <Berlin>을 비롯하여, <Loving Is Easy>, <Nova Lepidoptera>는 콘서트의 애창곡이 되었다.

Wooly의 탈퇴
역설적으로 BJH의 유럽에서의 주가상승은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티켓이 잘 팔리는 만큼 투어는 길어졌고, 투어가 끝나면 songbookww.jpg몇 달동안 쉬어야 했다. 79년 6월 독일의 로렐라이에서의 콘서트를 시작으로 도르트문트, 베를린에서 열린 콘서트는 Whitesnake, The Police, Dire Straits등의 인기를 압도했으며, Munich에서의 공연은 그 클라이막스였다. 그러나 이 공연이 4인조 BJH의 끝이 될줄이야! 이러한 성공의 대가는 너무 컸다. Wooly가 그룹 탈퇴를 공식 선언한 것이다.
현재까지 그의 탈퇴 이유가 명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후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성공에 대한 부담감, 건강상의 이유로 추측된다.
이 결정은 BJH가 새로운 앨범 제작을 준비하고 있을 때 였다. 모든 멤버들은 설득에 나섰지만 결국 Wooly는 9월에 공식적으로 탈퇴를 선언한다. <Wooly의 탈퇴 = BJH의 해체>라는 등식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비록 그가 John이나 Les보다 적은 수의 곡을 만들기는 했지만, BJH적인 사운드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제 겨우 가을이 되어 추수(Harvest)하게될 벼를 눈앞에 두고 그룹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의 손실은 남은 멤버들에게는 큰 타격 이었다. 그러나 BJH가 택한 방법은 그룹을 해체시키는 것도, 그를 대신할 새로운 멤버를 찾는것도 아니었다. 팬들과 Wooly모두를 실망시키지 않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세션 뮤지션을 쓰면서 트리오로 음악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고 명곡 <Play to the World>가 담겨있는 앨범 "Eyes of the Universe"를 79년 말에 발표한다. Les가 키보드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Make Honey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던 Kevin McAlea가 도와둔다. Wooly의 특징인 복잡함과 섬세함이 결여된 록적 앨범이었지만 흥행은 잘되어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커다란 히트를 기록한다.
한편, Wooly는 1년 후 솔로앨범 "Maestoso"를 발표하고 Judie Tzuke의 짧은 투어에 BJH에 걸맞지 않는 모습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귀머거리가 되었고 현재는 음악계에서 완전히 은퇴해 그의 농장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Berlin Live
BJH는 80년대를 9개국에서 53회에 이르는 콘서트에 25만명의 관중을 동원하는 유럽투어로 시작한다. 고국인 영국에서의 홀대를 보란 듯이 독일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BJH는 독일에서만 무려 26회의 공연을 여는데, 모든 입장권이 투어가 시작하berlin.jpg기 전에 이미 매진되었다.
긴 투어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 BJH는 또 하나의 큰일을 벌이기 위해 다시 독일로 건너간다. 아주 매우 중요한 공연이 될 그것을 위해.. 그것은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열렸던 콘서트 중 스케쥴에 맞는 장소가 없어서 이루어지지 못했던 베를린에서의 공연을 위해서였다. 이 공연은 독일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프리 콘서트로 계획된다. 선택된 장소는 철의 장벽인 베를린 장벽과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는 Reichstag.
80년 8월 30일 토요일이 밝아오고,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약 25만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이 공연은 <Love On The Line>으로 시작해서 2시간 반동안 열려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었고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벽의 반대편인 동베를린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음악을 즐리고 있었다. 그 콘서트에서 초연된 노래인 <In Memory Of The Martyrs>와 Les Holroyd의 상업적인 작품인 <Life Is For Living>은 유럽 전체에서 큰 히트를 기록하고 <Turn Of The Tide>를 위한 중간역할을 한다.
이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BJH는 그에 따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떻게 그 성공을 계속 유지할수 있을까? 그 이전의 3년간 BJH를 성공으로 이끈 것은 장기간의 투어, 베를린에서 보여주었듯이 넓은 개최장소에서의 박진감 있는 쇼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81년 5월 발표된 새앨범 "Turn Of The Tide"는 이러한 중압감 때문인지 팬들을 실망시키기도 하지만 <How Do You Feel Now>와 <Echoes And Shadows>같은 잘 다듬어진 곡들도 들을수 있다.
계속되는 앨범 홍보를 위한 유럽투어는 82년까지 계속되며, 82년 7월에 80년 베를린에서의 라이브 실황을 담은 "Berlin - A Concert For The People"이 발매와 동시에 독일에서 1위를 기록한다.
다음 앨범의 녹음을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건너간 BJH는 83년 5월, 1년여의 작업 끝에 오케스트라를 도입한 앨범 "Ring Of Change"를 발표한다. 그러나 풍부한 음향과 과도한 모험을 지하기 위해 사용된 디지틀 레코딩 기술은 프로듀서의 자질 문제와 함께 팬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이후
사실 이 앨범 이후의 음반들은 BJH를 사랑하는 옛 팬들에게는 큰 매력이 없다. 다른 그룹들이 그러했듯이 BJH도 이제 당당히(?) 상업적인 그룹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84년에 발표된 "Victims Of Circumstance"에 와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지나친 기교와 프로그레시브적 색채의 상실은 팬들에게 그들의 나약함을 보인 꼴이 되어 버렸다. 방송국의 청취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채택한 여성 백보컬과 계속된 투어는 밴드의 이미지를 저하시켰고, 곡들은 산만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옛 팬들을 잃어버리는 대신에 새로운 팬들이 생겨 판매고는 오히려 전 앨범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이어진 대형 콘서트에서 John이 손가락 부상을 당하고 그 해 10월 웸블리 아레나에서의 공연 후 팬들은 거의 2년동안 BJH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팬들은 비디오에서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으며, 해산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러나 이 루머들은 결국 87년 1월 "Face To Face"가 발표되자 사라졌으며, 더욱 의미 있는 것은 BJH가 다시 본래의 뿌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같은해 7월에는 동베를린의 Treptower 공원에서 베를린의 75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공연을 열어 그들의 팬이 철의 장벽 동쪽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사운드 트랙은 그 다음해 그들의 통산 4번째 라이브 앨범 "Glastnost"(개방)로 발매된다.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BJH는 89년 3월에 에릭 클랩튼, The Who와 함께 일했던 John Astley와 Andy MacPherson를 새로운 프로듀서로 맞아 들였고, 멤버들은 의욕에 넘쳐 있었다. John은 당시의 분위기가 Wooly가 있었을 때 같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90년 3월에 Wooly가 떠난 이후 최고의 앨범이라고 말하여 지는 "Welcome To The Show"가 발표되고, 93년 6월에는 "Caught In The Light"가 발표된다.

마치면서
비, 바다, 밀려오는 파도.
모래, 구름과 하는.
쉿, 울지 말아요.
나무위에서 노래하는
mockingbird가 있잖아요.
당신과 나를 위해 노래하는
mockingbird가 있잖아요.

이제 거의 3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접어든 영국의 노장 그룹 Barclay James harvest가 걸어온 인생역정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그룹의 나이 30이라면 이미 중년을 넘어선 것이지만 영광과 좌절, 성공과 실패를 겪으며 자라온 BJH에게 있어 나이라는 것은 무의미 하다. 늙는 다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끈질긴 생명력과 전원적이고도 진지한 음악으로 전세계에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Barclay James Harvest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글 : 맹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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